다시 만난 날 (Patr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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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이 되자 중학생때와는 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더 이상 고등학교에는 일진, 이진이 존재하지 않았다. 각자가 자신의 미래를 신경쓰기 바빴고, 노는 아이들을 부러움이 아닌 한심한 눈초리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탈진주’(진주를 탈출해서 다른 지역의 대학교를 가자는 뜻)는 우리학교 모든 학생들의 소원이었다.
그토록 요란스러웠던 일진, 이진들은 이제 성적이 좋은 아이들에게 필기를 빌리기 바빴다. 아이들은 노는 아이들이 아닌, 공부 잘하는 친구들과 친해지고 싶어했기 때문에 자연히 성적이 일종의 서열처럼 되는 듯 했지만, 그 서열은 절대로 공포감이나 긴장감을 조성하는 부류가 아니었다.
고3이 되었다. 정시를 앞두고 많은 학생들이 그러하듯, 나도 불안한 마음에 수시를 준비하며 학교 근처 논술 학원을 등록하게 되었다. 성적별로 반이 배정되는 논술학원에서 나는 가장 높은 레벨의 반으로 들어갔다.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자판기에서 율무차나 뽑아마실까 하고 복도로 나와 걷고 있는데, 하급 레벨 교실을 지나가게 되었다. 문득 안을 쳐다봤는데 앉아 있던 학생이 너무나 반가운 얼굴로 방긋 웃으며 내 이름을 불렀다.
“어머, 은비야…!! 안녕?? ”
처음엔 누군가 했다. 갸웃하며 다시 보니 민행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처음 보는 거였다. 너무너무 반갑게 인사를 해서 하마터면 친한 친구로 착각할 뻔 했다. 나는 살짝 미소지으며 “어 안녕?” 하고 답했다. 그리고 친구들과 가던 길을 갔다. 친구들은 내게 누구냐고, 아는 친구냐고 물었고 난 대답했다. “아, 쟤 예전에 나 볼때마다 욕하면서 괴롭혔던 앤데. 친한 척을 하네 ㅎㅎ” 내 말을 들은 친구들은 “뭐? 뭐 그런 애가 다있어” 하며 지나온 길 쪽으로 눈을 흘겼다.
그 날 그렇게 논술학원에서 민행이를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난 그 아이의 이름을 까먹었을까? 하지만 우린 그렇게 마주쳤고 난 아직도 그 아이의 이름 세글자와 그 날의 장면이 기억난다. 정말 유치하지만… 너무… 통쾌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때 친구가 별로 없던 나를, 세명이서 무리지어 다니며 마주칠 때마다 욕을 하던 그 아이가, 논술학원에서는 교실에 덩그러니 혼자 앉아 있었다. 정말 유치하지만, 나는 상급반이고 친구들과 함께 있었고, 그 아이는 하급반이고 혼자였다는 그 사실만으로 내게는 최고의 복수였다.
‘니가 그렇게 괴롭혔던 나랑 이제서야 친하게 지내고 싶니? 미안하지만 난 그럴 생각 없어. 그러게 예전에 왜 그렇게 못되게 굴었니? 사람일은 모르는 거야, 그렇지? ’
최근에 한 인플루언서가 학교폭력으로 이슈가 되고, 나의 학창시절이 생각나서 길게 일기를 써보았다. 그 인플루언서는 하필이면 내가 정말로 예쁘다고 생각하던 사람이어서 더 충격적이었다. 부드러운 인상에 해맑은 미소. 개인적으로 너무나 좋아하는 얼굴이라서 동경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폭로된 과거는 도저히 감싸줄 수 없는 수준이었다.
내가 겪은 학교 폭력은 오직 민행이 사건 하나 뿐이고, 이 사건은 남들이 듣기에는 사실 학폭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별 것 아닌 수준의 일일 수도 있다. 민행이 본인도 학교 폭력 가해자였던 적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할지도. 하지만 당사자인 내게는 그렇지 않다. 내 인생에서 나는 그 이름 세글자를 잊지 못할테니까.
해당 인플루언서는 더 나아가 돈을 빼앗고 집단으로 괴롭히고 욕을 하고 때리며 친구들을 짓밟았다. 그 행동들은 절대로 절대로 철없던 시절의 실수라고 치부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철없던 시절에 그렇게 잔인하게 행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사람의 본성이 얼마나 악한 지 알 수 있는 것이다. 피해자들은 평생 잊지 못할테니까. 기쁜 기억들로 치유한다 하더라도 가해자의 이름 세글자는 ‘흉터’로 남는다.
너무 예쁜 그녀의 얼굴이 이제는 독하게 보일 것 같다. 부디… 앞으로는 많은 선행들들 베풀며 반성하는 삶을 살길.
-학폭 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