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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하네요.”

“……그러게.”

“아, 아하하…….”


방과 후, 봉사활동부 부실.

우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반에서 할 일도 없으니 각자 소속된 부에서 활동하는 시간을 가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봉사활동부는 지금 일거리가 없습니다.


저는 부비로 구입한 간식을 레레한테 먹이면서 따분한 시간을 달래는 중입니다.

레레는 힐 슬라임이지만 무조건 약초만 먹는 건 아닙니다.

달달한 과자도 좋아하는지 아까부터 맛있게 비스킷을 먹고 있었습니다.


“뭔가 게임이라도 할까요?”

“싫어. 보드게임이나 카드 게임은 메이가 너무 잘 하잖아.”


메이한테 시선을 돌리자 마찬가지로 레어한테 간식을 주고 있습니다.

제 시선을 느낀 걸까요, 레어는 비스킷을 먹다 말고 메이 뒤로 숨어버렸습니다.

정말 겁이 많은 아이예요.


“……시몬이 너무 간파하기 쉬운 것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그걸 감안하더라도 메이 짱은 보드게임을 참 잘하죠.”


이제 입학한 지 슬슬 한 달 차에 접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봉사활동부에는 의뢰가 들어온 적이 없었고, 덕분에 부활동 시간에는 심심풀이 삼아 게임을 하며 시간만 보내는 중입니다.

포커나 블랙잭 같은 카드 게임, 체스나 오셀로 같은 보드게임에선 메이가 압도적인 실력을 과시했습니다.

참고로 그다음 실력이 좋은 사람은 의외로—— 의외라고 하면 실례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릴리 님이었습니다. 시몬과 저는 항상 최하위를 다투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나는 한가하지 않다고.”

“뭘 하고 있는데요?”

“포스터를 그리는 중이야.”

“……문화제 거?”

“아, 아뇨, 시몬 짱한테 우리 부의 포스터를 부탁했거든요.”


바로 그거야, 라면서 시몬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다음 말을 이었습니다.


“이 바쁜 문화제 시기에 일거리가 단 하나도 안 들어오다니, 그건 그냥 선전이 부족해서 그런 거잖아. 오늘 아침에 학생 게시판 전시 허가도 받은 김에 간단한 광고 포스터는 붙여 놨지만, 기왕 할 거면 제대로 하고 싶으니까.”

“““시몬 짱 대단해!!”””

“이, 이 정도야 보통이지. 나도 부원이니까. 그것보단 마무리가 늦어져서 미안해, 릴리. 서두를게.”

“““겸손하기까지!!”””

“뭐, 뭐야 대체…….”


정말로 시몬은 착한 아이네요.

그건 그렇고,


“역시 어느 정도는 우리가 직접 곤란해하는 학생을 찾아 나서는 모습도 보여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그런 느낌도 조금 들기 시작했어.”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네.”

“으, 으으으…….”


고난을 성장의 기회로 여기기 때문에 주도적으로 남에게 도움을 청하는 자세를 기껍게 여기는 릴리 님의 사고방식은 존중합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봉사활동부가 시간 때우기부가 될 거예요.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을 때, 부실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울렸습니다.


“네, 네에!”

“안녕. 여기가 봉사활동부 부실 맞아?”


그 말과 함께 얼굴을 내민 건 여학생 두 사람이었습니다.


◆◇◆◇◆


“내 이름은 리디 글랙, 이쪽은 루이즈 모던.”

“안녕하세요.”

“처, 처음 뵙겠어요. 부, 부장인 릴리 릴리움입니다.”


저는 간결하게 인사를 나누는 세 사람을 슬쩍 관찰했습니다.

리디는 키가 훤칠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왠지 중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여성이었습니다.

루이즈는 여성스러움이 드러나는 빼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어서 어느 나라의 귀족이나 왕족이라는 얘기를 들어도 아 그렇구나 하고 납득할 만한 인상을 주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을 맞이하는 릴리 님 역시 이견의 여지없는 미인이지만, 어쩐지 소시민처럼 보인다고 해야 하나, 소동물 같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친숙함이 느껴지는 분위기라서 저 두 사람과 함께 있으면 조금 이질적으로 보였습니다.


“우리 둘은 연극부 소속이야. 문화제에서 연극을 상연하기로 정했는데 그때 봉사활동부의 힘을 빌리고 싶거든.”

“연극…… 과연 그렇군요. 어쩐지.”


리디를 봐도 루이즈를 봐도, 일반인치고는 아주 똑바른 자세도 그렇고 몸짓 역시 빈틈이 없었습니다.

처음 봤을 땐 둘 다 무술을 연마했나 싶었지만, 또 그런 것치고는 행동 하나하나가 직설적이라기보단 함축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연극 배우라고 들으니 바로 납득이 갔습니다.


“여, 연극부에서 오셨군요……. 그, 그래서 우리는 어떤 걸 도와드리면 될까요?”

“문화제 날까지 이제 1주일도 안 남은 시기인데 부원 중 두 명이 한꺼번에 유행병에 걸려버렸어. 역할 자체는 단역이지만 절대로 뺄 수 없는 역할이야. 그래서 빠진 역할을 채워줬으면 해.”


쉽게 말해 무대 위에 서서 연기를 해줬으면 좋겠다는 의뢰입니다.


“여, 연극 배역을 도와달라는 부탁인가요……. 연극에서 쓸 대도구나 소도구를 도와달라는 거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대 위에 올라가는 건…….”

“안 되겠어?”

“그, 그게,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여, 여러분 중에 연극 경험자가 있나요?”


리디의 간절한 시선을 받으며, 릴리 님은 우리를 향해 난처한 듯이 물어봤습니다.


“저는 해본 적이 없네요.”

“……메이도.”

“나도 없어.”

“하, 하긴 그렇겠죠…….”


연극은 굳이 말하자면 왕족이나 옛 귀족들이 주로 향유하던 문화입니다.

물론 배우야 대부분이 일반 시민이겠지만, 아무튼 연극을 관람해 본 경험이 있는 학생조차 드물 텐데 하물며 실제로 무대 위에서 연기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을 찾긴 더더욱 힘들겠죠.


“그렇게까지 어려운 배역은 아니야. 일주일 동안 열심히 연습하면 초보자라도 나름 그럴듯하게 폼이 잡힐 거야.”

“연기하기 쉽게 대본도 어느 정도까진 수정할 수 있어. 어떻게든 부탁할 수 없을까?”

“으, 으음……. 잠깐 의논할 시간을 주세요.”

“……알겠어.”


시간을 달라는 말에 수긍하는 대답을 남기고 부실을 나가던 도중, 리디는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습니다.


“참고로 맡기고 싶은 배역 둘은 복잡한 사연을 가진 연인 사이라는 설정이야.”


마지막으로 찡긋하고 장난기 넘치는 윙크를 남기고서, 좋은 대답을 기대하고 있겠다는 말과 함께 둘 다 자리를 떠났습니다.


“어, 그럼, 방금 일에 대해 의논해 보려고 하는데, 이번 의뢰를——.”

“수락하는 게 당연해요.”

“즈, 즉답이에요?!”


뭐라고 얘기를 꺼내려는 릴리 님의 말을 자르고서 바로 대답했습니다.

릴리 님의 목소리에서 당혹감이 잔뜩 묻어 나옵니다.


“이렇게 재미있어 보이는 일을 놓친다는 건 말도 안 돼요. 기념할 만한 봉사활동부의 제1호 의뢰에 어울리는 의뢰예요.”

“그, 그런가요……? 꽤 어려워 보이는 의뢰인데요……?”

“……릴리 님은 이해를 못 했네.”

“네?”

“저건 그냥 알레어가 갖다 붙인 구실이야, 릴리. 속내는 더 음흉한 속셈으로 가득해. 나도 바로 알겠는걸.”

“네에에?!”


메이는 어깨를 으쓱했고, 시몬은 어처구니없다는 기색입니다.

어머, 그렇게까지 속이 들여다보였던 걸까요.

릴리 님 혼자만 어리둥절해하는 모양입니다.


“무, 무슨 뜻인가요?”

“……의뢰에서 부탁받은 배역 두 사람의 관계는?”

“어, 그게, 연인 사이였죠.”

“그걸 듣고 알레어가 두말없이 승낙했다는 뜻은?”

“???”

“릴리 님! 연인 사이 역할이에요!”

“아…… 아아아, 그런 거였어요?!”


열의로 넘쳐흐르는 제 목소리에 릴리 님은 이제야 깨달았나 봅니다.


“주역이 아니라서 살짝 아쉽지만, 당당한 명분을 등에 업고 연인 사이를 연기할 수 있는 건 좋네요!”

“무, 무무무, 무리라고요! 리, 릴리가 연기라니!”


의욕으로 가득한 저와는 정반대로 릴리 님은 주저하는 기색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리디가 그랬잖아요. 그렇게까지 어려운 배역은 아니라고요.”

“그,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리, 릴리는 이런 역할에 어울리지 않아요! 애초에 남들 앞에 서는 것조차도 잘 못하는데……!”

“이런 건 익숙해지면 그만이에요, 릴리 님. 언젠가 정령교회로 복귀했을 때, 남들 앞에서 얘기를 못 해서야 곤란하잖아요? 다시 말해——.”

“다, 다시 말해……?”

“충격 요법이에요.”

“무—리—예—요—!”


릴리 님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습니다.


“저랑 연인을 연기하는 게 그렇게나 싫으세요? 아무리 그래도 조금 상처예요.”

“그, 그런 뜻이 아니에요! 저, 적성에 맞냐 아니냐의 문제예요!”

“……릴리 님, 고난은 사람을 성장시킨다고 하지 않았어?”

“메이, 너무 그러지 마.”

“후에에엥…….”


메이가 냉정하게 정곡을 찌르자, 릴리 님은 완전히 침몰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뭐, 그럼 릴리 님을 놀리는 건 이 정도만 할까요.”

“……그러자.”

“어? 진심인 줄 알았는데.”

“자, 잠깐만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뜻을 밝히자 메이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고, 시몬은 의뢰라는 표정을 지었고, 릴리 님은 이젠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입니다.


“릴리 님과 연인 역할을 연기하고 싶다는 건 정말이지만, 억지로 강요할 생각은 없어요. 이건 일이니까요.”

“……알레어는 의외로 그런 부분에선 분별력이 있지.”

“70% 정도는 진심이었잖아.”

“90%였어요.”

“아, 그래.”


저도 할 수만 있다면 하고 싶었다고요.


“시몬은 하고 싶나요?”

“나는 패스. 대본을 외울 자신이 없는걸.”

“릴리 님도 사양했고…… 그렇다는 말은 메이랑 제가 합을 맞추는 게 무난하려나요?”

“……메이는 상관없어. 알레어가 메이의 신부. 후후후…….”


고개를 끄덕이는 메이는 기분 탓인지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뭘까요?


“그, 그럼 이번 의뢰는 받아들여도 될까요?”

“네에, 수락하죠. 드디어 봉사활동부가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게 되었네요.”

“저, 정말 고마워요, 알레어 짱, 메이 짱!”

“잠깐, 나도 도울 거거든?”

“물론 시몬 짱도 고마워요!”


아까 눈물이 그렁그렁하던 사람은 어디 갔는지.

릴리 님은 민들레처럼 활짝 웃었습니다.


“그렇게 정해졌으니 어서 빨리 리디 씨한테 말을 전하고 올게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릴리 님. 이왕 가는 거 넷이 함께 가죠.”

“……대본이나 그밖에 더 도울 게 있는지도 묻고 싶어.”

“그러네, 그러는 편이 수고를 덜겠어.”

“그, 그렇군요. 그럼 다 같이 가요!”


이리하여 봉사활동부는 첫 의뢰—— 결원이 생긴 연극부의 역할 보충을 맡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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