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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혐의


“웃기는 소리하지 마세요!”


해가 저문 시각, 학교 기숙사.

마력의 불빛이 비춰주는 방 안에 제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책상 위에 있던 레레어가 몸을 움츠리는 것처럼 쪼그라듭니다.


감옥에서 풀려난 레이가 가져온 건 터무니없는 소식이었습니다.

먼저 레이는 학적을 잃고 로세이유 폐하 직속 특무관으로 임명됐다는 것과, 릴리 추기경과 저도 그 일을 돕게 됐다는 것.

여기까지는 놀라긴 했어도 그나마 허용 가능한 범위입니다.

한낱 평민에 불과한 레이의 출세를 기뻐할지언정, 반대할 이유는 전혀 없어요.

문제는 폐하께서 레이에게 명한 귀족들의 부정부패 조사의 대상에 아버님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아버님이 부정?! 그런 바보 같은 이야기가 있을 리 없잖아요!!”


아버님은 이상적인 바우어 귀족입니다.

나라의 금고지기로서 바우어에 몸 바쳐 헌신해왔는데 그런 오명을 뒤집어쓰다니 가당치도 않은 일.


“자자, 진정하세요. 아직 혐의가 있을 뿐이니까요.”


레이가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로세이유 폐하가 겨우 의심만 가지고 그런 말을 쉽게 입 밖에 꺼낼 거라곤 생각할 수 없습니다.

폐하는 아마 어떤 확신을 가지고서 아버님을 의심하고 있을 게 틀림없어요.


“그런 의심을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지금 폐하가 제정신인지 의심스러워요! 프랑소와 가문은 대대로 왕국의 금고를 책임지고 맡아왔어요. 그런데 부정이라니!”


바캉스 때 귀족제도에 의문을 품게 된 이후로 저는 귀족의 부패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조사하는 동안 실제로 부정을 저지르고 있을 법한 귀족의 정보도 손에 넣었습니다.

그러나 아버님은 다릅니다.

분명…… 다를 겁니다.


“하, 하지만 클레어 님. 이건 오히려 찬스일지도 몰라요.”


제가 펄쩍 뛰며 화를 내는 모습에 겁을 먹으면서도 말을 꺼낸 사람은 릴리 추기경이었습니다.

릴리 추기경은 마침 제 방에 놀러와 있던 참이라 레이가 전하는 소식을 같이 듣게 됐습니다.


“찬스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요, 릴리 추기경?”

“리, 릴리도 아버님이 그런 부정을 저지르고 있다고 믿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저희들이 아버님들의 결백을 증명하면 되는 거 아닐까 생각해요.”


릴리 추기경은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고 말했습니다.

확실히 우리가 아버님들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죄가 있음을 증명하는 일에 비해, 죄가 없다는 걸 증명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저는 혐의가 걸려있는 아버님들이 본보기로 처벌당하는 걸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아, 아버님들한테 걸린 혐의는 어떤 부정에 대한 혐의인가요?”

“그게…… 저도 아직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폐하는 로드 님에게 물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지금 당장 물어보러 가죠.”


대체 어떤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버젓이 내세우고 있을지 한시라도 빨리 확인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오늘은 너무 늦었습니다. 내일이 되면 클레어 님과 릴리 님 앞으로도 정식 임명장이 내려올 테니까 그때까지 기다린 다음 방문하도록 하죠.”

“……정말 답답하네요.”


레이가 저를 만류했습니다.

제가 지금 흥분한 상태라서 그런지, 레이는 반대로 아주 침착했습니다.

하긴 레이는 항상 침착하지만.


“도대체 어째서 릴리 추기경까지 말려들게 한 건가요, 당신.”

“네? 아뇨, 그야 사라스 님까지 조사하게 된다면야 릴리 님한테도 협력을——.”

“사태의 중대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네요. 이 나라의 유력자가 가진 비밀을 캔다는 건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위험을 동반하고 있는 거잖아요?”


하급 귀족이라면 모를까, 사라스 님이나 어버님처럼 고위 귀족을 조사한다는 건 그런 겁니다.

아버님들은 이 나라의 권력자입니다.

만에 하나 아버님들한테 뒤가 구린 구석이 있다면 그걸 어떻게든 무마하려고 할 터.

그리고 그건 부정을 추궁하는 사람들의 목숨까지 위협하는 수단이겠죠.


“리, 릴리도 수속성 마법을 쓸 수 있어요.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너무 위험해요. 게다가 레이의 호위로는 제가 곁에 있으니까요.”


저는 불속성의 높음 적성을 가진 마법사.

어지간히 솜씨에 자신이 있는 사람들한테도 지지 않아요.


“그, 그렇지만 릴리는 걱정이라고요!”

“쓸데없는 걱정이에요.”

“두, 두 분만 있게 놔두면 클레어 님이 레이 씨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할지!”

“걱정이란 게 그쪽이에요?!”


걱정을 해야 한다면 레이가 저한테 무슨 짓을 할지가 걱정이겠죠?!


“네? 저한테 무슨 짓 해주시는 건가요, 클레어 님?”

“안 한다고요!”

“어째서죠!!”

“어째서고 저째서고 간에 안 해요!”

“레, 레이 씨한테 손을 대지 않는다고요?! 제정신인가요?!”

“아아, 정말이지 성가시네요, 두 사람 다!!”


어쩐지 이런 농담을 주고받는 것도 오랜만이라는 느낌입니다.

요즘 들어서 많은 일들이 있었으니까요.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는 걸 빠르게 느꼈는지 레레어도 왠지 모르게 기뻐 보입니다.


“어쩔 수 없으니 릴리 추기경이 동행하는 것도 인정하겠지만 아무쪼록 조심하세요.”

“무, 물론이에요.”

“레이도 마찬가지니까요?”

“네에—.”


그날은 그런 대화를 마지막으로 하루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


이튿날 방과 후, 우리는 지체 없이 왕궁으로 가서 로드 님을 만났습니다.


“오, 왔구나.”


로드 님의 방은 과연 왕족이라는 인상이었습니다. 고급스런 가구들이 가득한 넓은 방입니다.

방은 전체적으로 따뜻한 색조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제 방도 어지간히 화려한 편이라고 자부하고 있지만 이 방에 비할 바는 아니겠죠.

교회에서 청빈한 생활을 보내던 릴리 추기경은 이런 호화로운 방이 익숙하지 않은지 불편한 기색입니다.

그에 비해 레이가 태연한 기색인 건 그릇이 커서 그런 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나는 에둘러 말하는 건 좋아하지 않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사라스와 도르는 부정을 저질러서 재산을 축적하고 있어.”


로드 님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단정 짓는 말투로 본론을 꺼냈습니다.

로드 님이야 언제나 그런 성격이지만 지금만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외람되지만 로드 님. 그렇게 말씀하신다는 건 뭔가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는 뜻이겠죠?”


어젯밤에 카트린이 좀 냉정해지라고 단단히 타일러준 덕에, 저는 로드 님한테 증거가 있는지부터 물었습니다.


“아니, 없어.”

“어, 없는 건가요?”


릴리 추기경이 김이 빠진 듯한 목소리를 냈습니다.

그것도 그렇습니다.

증거도 없이 혐의를 씌우다니 그냥 생트집에 불과합니다.


“자자, 있어봐. 지금 없는 건 결정적인 증거뿐이다. 정황증거라면 얼마든지 있어.”


그러면서 로드 님은 지금까지 직접 수사한 자료를 보여줬습니다.


“사라스도 도르도 아주 영악해. 그렇게 쉽게 꼬리를 잡히지 않아. 직접 말로 하거나 서면으로 남겨두지 않고, 부하들이나 주변 인물들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알아서 움직여주고 있어.”


로드 님이 내민 자료들은 사라스 님과 아버님 주변에 적지 않은 돈이 사라지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개중에는 구체적인 죄목과 이름이 적혀있는 귀족들도 있었지만 아버님들과 직접 연결지을만한 증거는 없는 모양입니다.


“여기에 이름이 적혀있는 자들부터 체포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구체적 자료까지 직접 눈으로 보고서도, 저는 여전히 아버님의 무죄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어디까지나 혐의를 벗기 위한 의도로 로드 님에게 물었습니다.


“실제로 손을 더럽히는 건 이 자들이지만 이런 녀석들을 아무리 많이 잡아들여봤자 의미가 없어. 도마뱀 꼬리 자르기로 끝날 뿐이야.”


로드 님은 실제로 몇 명 체포해봤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지?”


로드 님이 도전적인 빛이 가득 담긴 눈으로 레이에게 물었습니다.


“폐하께도 말씀드렸지만 먼저 로드 님이 말씀한 곁가지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호오?”

“이 자료들의 복사본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해서 미리 준비해놨지. 가져가라.”


로드 님이 탁상 위에 놓인 종을 울리자 시종이 종이 다발을 가지고 왔습니다.

레이가 그걸 건네받았습니다.


“그럼 로드 님. 저희들은 이만.”

“아아, 잠깐 기다려, 레이 테일러.”


레이는 그만 방을 나가려고 했는데, 로드 님은 어째선지 성까지 붙여 레이를 부르면서 멈춰 세웠습니다.

레이가 찡그린 표정으로 뒤를 돌아봅니다.


“무슨 일이신가요?”

“아니, 별거 아니긴 하다만 일단 지금 기회에 한번 물어봐 둘까 싶어서 말이지.”


로드 님이 웬일로 머뭇거리며 말을 끌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일까요?


“저, 왠지 엄청나게 듣고 싶지 않습니다만.”

“그런 말 하지 말고.”

“이제 그만 가도 될까요?”

“내 용건이 끝나면 말이지.”


그리고서 로드 님은 이렇게 말한 겁니다.


“레이 테일러. 너, 내 아내가 될 생각은 없나?”


그건 틀림없는 프러포즈였습니다.


69. 가치관의 차이


“레이 테일러. 너 내 아내가 될 생각은 없나?”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말이라서 레이도, 릴리 추기경도, 그리고 마찬가지로 저도 굳어버렸습니다.

구혼…… 그것도 평민인 레이한테?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어떻게든 정리하면서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한 건지 물어봐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제정신인가요, 로드 님?!”


그런데 제 입에서 튀어나온 질문은 반쯤 비명에 가까웠습니다.


“펴, 평민을 왕족으로 맞이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는데?”


릴리 추기경의 물음에도 로드 님은 태연하게 대답했습니다.

레이는 어떤가 싶어서 봤더니, 드물게도 진지한 표정을 짓고서 생각에 잠겨 있습니다.

당연한 일이겠죠.

갑자기 왕족한테 구혼을 받은 겁니다.

혼란스럽지 않은 게 더 이상하겠죠.


레이는 잠시 생각한 다음 입을 열었습니다.


“일단 여쭤보겠습니다만 농담 삼아 하는 말씀이신가요?”

“아니, 진심이다.”

“허어……. 대체 저의 어디가 마음에 드셨나요?”

“성격과…… 그리고 능력이겠네. 예전부터 너는 대단한 녀석이라고 생각했어.”


로드 님이 유쾌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그에 비해 레이는…… 무슨 표정인지 읽어낼 수 없는 복잡한 얼굴입니다.


“저, 뭔가 했었던가요?”

“학교 습격을 미연에 방지했지, 세인의 독을 치료했지, 오르소 가문을 위기에서 구했지, 마나리아한테 한 방 먹이기도 했고, 유클레드의 유령선 소동도 해결했어.”


로드 님은 레이가 세운 공적들을 아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열거해보면 레이의 능력이 범상치 않다는 걸 잘 알 수 있습니다.

타고난 신분보다 가진 능력과 흥미로움을 중시하는 로드 님이라면 확실히 레이 같은 여성을 선택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레이는 제 사람인데——.


“아뇨, 그건 거의 다 클레어 님의 공적입니다만…….”

“클레어, 그런가?”


갑자기 제 이름이 튀어나와서 정신을 차렸습니다.

지금 스스로가 동요하고 있다는 걸 자각하자 더욱 혼란스러워질 것 같았지만 필사적으로 정신을 수습하고서 질문에 대답했습니다.

“아니에요, 레이가 최선을 다한 결과예요.”


분명 레이 혼자 힘만으론 이룰 수 없었던 공적들도 많았다는 생각은 듭니다.

하지만 동시에 레이 없이는 결코 해낼 수 없는 일들이었다는 것 또한 사실.

분하기도 하고, 이걸 인정함으로서 생길 결과가 두렵기도 했지만, 레이가 이룬 성과는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한다는 게 제 생각이었습니다.


——설령 제 발언 때문에 레이가 제 곁을 떠나가게 된다 하더라도.


“결정적이었던 건 이번 유의 사건이었지. 왕궁이 오랫동안 끌어안고 있었던 난제를 훌륭하게 해결했어.”

“그것도 저 혼자만의 공은 아닙니다만…….”

“겸손은 필요 없어. 그 중심에 있었던 게 너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으니.”


로드 님 말대로입니다.

레이가 없었다면 유 님은 아직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원하지 않는 성별로 생활했겠죠.


“내 반려가 될 사람이라면 틀에 박힌 흔해빠진 아가씨가 아니라 너 같은 여장부가 어울려.”


저는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해봤습니다.

국왕이 된 로드 님과 왕비가 된 레이.

신기하게도 어떤 모습일지 쉽게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때?”


로드 님이 장난스러운 어투로 물었지만 눈에는 웃음기가 없었습니다.

정말 진심입니다.


“어떠냐고 하셔도, 그냥 평범하게 거절하겠습니다만.”

“잠깐만요, 레이?!”


저는 기겁했습니다.

설마 레이가 거절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평민이 왕족과 이름을 나란히 두게 된다니 전대미문이지만 평민 입장에선 더없는 명예일 터.

가난한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레이의 부모님도 크게 기뻐하실 게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거절이라니!


“당신은 지금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고는 있는 건가요?!”

“무슨 소리냐뇨, 프러포즈에 대해 거절을——.”

“왕비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거라고요!”

“에이, 딱히 되고 싶지도 않은걸요.”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태도. 레이는 마치 숙제 좀 도와달라는 부탁을 거절하는 것처럼 가벼운 어조로 말했습니다.

얘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요!


“바란다고 해도 얻을 수 없는 영예라고요!”

“제 입장에서 보면 영예가 아닙니다.”

“어째서!”

“그야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클레어 님인걸요.”


아니 이 얘기는 애초에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당신이 저한테 호의를 품고 있다는 사실이야 충분히 알고 있어요.

하지만 결혼은 별개잖아요?

결혼은 가문과 가문의 결속입니다.

거기에 개인의 호불호가 끼어들 여지는 없습니다.


“흐핫핫하! 그렇겠지! 너라면 그렇게 말하겠지!”


로드 님을 책상을 두드리면서 배까지 잡고 웃었습니다.


“클레어. 레이한테는 너와 함께 하는 게 왕족과 결혼하는 것보다도 훨씬 가치 있는 일인 모양인데?”


프러포즈에 퇴짜를 맞았는데도 로드 님은 즐거워하는 기색으로 저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안색이 새파래져서 어떻게든 이 귀중한 혼담이 파토나지 않도록 말을 이었습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하시길. 이 자도 너무 갑작스러운 말에 혼란스러워하는 거예요. 좀 진정한 다음엔 분명 로드 님의 마음을 받아들이겠다고 생각을 바꾸겠죠.”

“아뇨, 저는 지금 어디까지나 냉정하게——.”

“부탁이니까 당신은 잠깐 입 좀 다물고 있어줘요.”


레이의 입을 다물게 만들고서 저는 로드 님에게 변명했습니다.

레이는 사태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건 평민들끼리 지지고 볶는 일이랑은 아예 차원이 다른 문제예요.

평민이 왕족한테 구혼을 받았는데 제안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는 소문이 퍼지면 자기 딸을 왕비로 천거하고 있는 다른 귀족들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이때다 싶어서 바로 공격대상으로 삼을 게 자명하겠죠.

로드 님한테는 그럴 의도가 없다고 해도, 주변에서 들고 일어나 불경죄를 따져 물을 게 분명합니다.

총명한 로드 님이 하시는 일이니만큼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빈틈없이 살피겠지만, 드러내놓고 움직이는 수작은 무마하더라도, 암살이나 불의의 습격까지 막아낼 순 없습니다.

레이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은 구혼을 받아들이고 로드 님의 보호를 받는 겁니다.


“로드 님, 부디 이 혼담에 대해선 지금 당장 결론을 내리지 말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물론이야. 레이가 어떻게 생각하든 내 마음은 바뀌지 않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그럼 이 이야기는 다음에 또.”

“그래.”

“자, 가자고요. 레이, 릴리 추기경.”


저는 그렇게 말하고서 레이와 릴리 추기경을 데리고 로드 님의 방에서 나왔습니다.


“자, 잠깐만요, 클레어 님.”

“…….”


레이가 뭔가 불만스러운 눈빛을 보냈지만 저는 힘껏 노려보는 걸로 입을 막았습니다.

제가 다시 말문을 연 건 릴리 추기경과 헤어져서 기숙사로 돌아가는 마차에 탄 다음이었습니다.


“레이……. 까부는 것도 정도껏 하도록 하세요.”


저는 진지하게 질책하는 어조로 말했습니다.


“까불다니 대체 뭐가요?”

“말할 것도 없잖아요! 로드 님의 구혼을 거절한 거 말이에요!”


이런 상황에 이르러서까지 장난칠 생각인가 싶어서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거칠어지는 걸 억누르기 힘들었습니다.


“아니, 그치만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결혼할 수는 없잖아요.”

“결혼은 당신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당신이 왕실에 시집을 간다면 레이네 부모님도 얼마나 기뻐하실지…….”


왕가의 일원이 된다면 응당 가족들에게도 국고로부터 지원금이나 기타 여러 가지 명목으로 돈이 들어옵니다.

아니, 돈이나 그런 실리적인 부분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대단한 영예입니다.

자기 딸이 왕족이 된다—— 부모님 입장에서 이보다 더한 기쁨이 있을까요.


“하지만 짐작이긴 해도 부모님도 제 선택을 지지해주실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레이는 태연자약하게 말했습니다.

이건 그런 게 아닙니다.

레이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건 그렇겠죠. 부모님 두 분 다 훌륭한 분들이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거기에 기대서 어리광만 부려도 되는 건가요? 아버님과 어머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그건…….”


레이는 결혼을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일일 뿐이라고 지나치게 가벼이 여기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배우자와 결혼해서 부모님에게 기쁨을 드리고 싶은 생각은 없는 걸까요.

왕족의 프러포즈를 걷어차다니 이 보다 더한 불효도 없습니다.


“하지만 클레어 님. 저는 클레어 님 말고는 누구와도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레이의 목소리는 진지했습니다.

왕족과의 결혼보다도 저를 선택하겠다는 말을 듣자, 마음이 흔들리는 게 느껴졌지만 저는 자제심을 발휘해 꾹 억눌렀습니다.


“레이, 잘 들으세요.”


저는 레이를 어떻게든 설득해야겠다는 생각에 목소리를 가다듬었습니다.


“당신이 저를 사랑하고 있다는 건 잘 알았어요. 그건 솔직히 기쁘게 생각해요. 하지만 결혼은 별개의 이야기에요.”

“다르지 않다니까요.”

“아니요. 연애는 어느 정도 자유롭게 해도 괜찮겠죠. 하지만 결혼은 개인의 의사로 하는 게 아니에요.”

“클레어 님…….”

“로드 님의 구혼을 받아들이도록 하세요. 결혼한다고 해서 저와의 인연이 끊어지는 것도 아니에요. 오히려 당신이 왕족이 된다면 지금보다도 더 친하게 지낼 수도——.”

“클레어 님!”


레이가 단호하게 말을 끊어서 저도 모르게 말문이 막혔습니다.

어쩌면 처음 있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레이가 도중에 제 말을 끊는 건.


“저에게 있어서 결혼은 연애와 동등할 정도로…… 아니, 연애보다 훨씬 개인적인 일입니다.”

“레이…….”

“뭐라고 말씀하신들 저는 클레어 님이 아닌 다른 사람과는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


똑바로 눈을 응시하면서 던지는 말에 한순간이지만 저는 행복한 망상에 빠졌습니다.

레이와 둘이서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가고, 때때로 카트린과 미샤, 그리고 레네가 놀러오는 생활을 상상했던 겁니다.

피피와 로렛타랑도 함께 장을 보러 나가기도 하고.

릴리 추기경도 가끔씩 치근대러 올지도 모르죠.

어쩔 수 없으니 레이의 애인 자리 정도는…… 아니 제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죠.


그런 형편 좋은 일이 생길 리가 없습니다.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안 돼요.


저는 레이가 가진 가치관에 괴리감을 느꼈습니다.

평민들에겐 결혼이란 게 그만큼이나 개인적인 문제인 걸까요.

하지만 긴 안목으로 보면 제가 하는 말이 옳다는 게 확실합니다.


“레이, 잘 생각해보세요. 같은 여자끼리 결혼하는 건 불가능하잖아요?”

“그렇다면 저는 평생 결혼하지 않겠어요. 그저 그것뿐입니다.”

“제가 다른 누군가와 결혼한다고 해도?”

“……네.”


저는 프랑소와 가문의 무남독녀입니다.

제가 레이를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미래에는 분명 다른 고위 귀족과 정략결혼을 하게 될 겁니다.

그게 불합리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결혼이라는 건 원래 그런 거니까요.

레이는 그래도 상관없다고 말합니다.

왕족과의 결혼을 걷어차면서까지.


“……당신에 대해서 최근 들어서는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될 것 같았어요.”

“감사합니다.”“하지만——.”


저는 말을 이었습니다.


“당신에 대해서, 또 다시 알 수 없어졌어요.”


제 한마디에 상처 받은 표정을 짓는 레이를 보는 건 몹시도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70. 죄


“그래서? 레이 짱이랑은 화해했어—?”

“네에, 그건 어찌어찌.”


톰슨 남작가의 수사를 마친 날 밤.

레이가 돌아간 뒤, 저는 언제나처럼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숙사 방에서 카트린과 소소한 잡담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카트린은 이미 침대에 누웠고, 저는 화장대 앞에 앉아있습니다.


“정확히는 화해라기보다는…… 일단 문제를 나중으로 미뤄뒀을 뿐일지도 모르지만요.”


톰슨 남작가를 조사하기 직전에, 지금은 결혼에 관한 얘기는 꺼내지 말자고 레이와 합의했습니다.


“그것도 괜찮지 않아—? 오직 시간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있는 법인걸. 아, 클레어 짱, 사탕 꺼내줄래—?”

“또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나중에 꼭 이를 닦아야 해요?”

“알겠다니깐—.”


저는 익숙한 손길로 카트린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캔디 상자에서 사탕을 꺼냈습니다.


“많이 줄었네요. 이제 남은 게 3개밖에 없어요.”

“맛있었거든—. 이것도 나름 아끼면서 먹은 거야—.”


사탕을 건네자 카트린은 기쁜 표정으로 받아들고선 입에 쏙 넣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 저도 침대에 누웠습니다.


“뭐, 레이 짱과 있었던 문제는 그걸로 됐다 치고—.”

“……그렇게 넘어가도 되는 걸까.”

“됐다고 치고!”

“네네, 그래서요?”

“가장 중요한 귀족들의 부패에 관한 조사는 어땠어—?”

“……톰슨 남작가는 유죄였어요.”


남작가에서 레이가 장부를 조사하고, 로드 님한테 건네받은 자료와 대조해서 모순되는 부분을 지적하자 남작은 죄를 시인했습니다.

거기에 더해 레이가 사법거래를 제안한 덕에 옐 백작가와 끈이 이어져 있다는 것도 판명됐습니다.

레이가 저렇게나 뛰어난 수완을 발휘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저는 굉장히 놀랐습니다.

도중에 미토 코몬이 어쩌구 하는 이상한 상황극에 대해선 당시에 설명을 들었을 땐 납득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역시나 뭐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흠흠, 그래서?”

“그래서라뇨?”

“클레어 짱…… 우리가 하루 이틀 알고 지낸 것도 아니니까 얼버무려봤자 소용없다는 거 알잖아—?”

“…….”

“그것 말고도 더 알아낸 게 있는 거지—?”

“……안 좋은 소식이 한 가지 있어요.”


사실은 오자마자 그것부터 얘기할 생각이었는데 내용이 내용이니만큼 지금에 와서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카트린이 레이가 방에 있는 동안엔 모습을 감추고 이었던 것도 말을 꺼내지 못한 이유 중 하나였지만요.


“말해줄래—?”

“……톰슨 남작가에서 압수한 자료 중에는 아샤르 후작가에 관련된 기록이 있었어요.”

“……어떤 기록이야—?”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어조였지만 침대 위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작게 떨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망설였지만 카트린도 귀족가의 여식—— 어떤 식으로 결말을 지어야 할지 알고 있을 겁니다.


“아샤르 후작은 발리에 남작가와 손을 잡고서 인신매매를 자행한다는 의혹이 있어요.”

“…….”


침대 위에서 돌아오는 반응은 무거운 침묵이었습니다.


톰슨 남작이 가지고 있던 건 발리에 남작이 보낸 편지였습니다.

거기에는 현재 거래되고 있는 인원수를 좀 더 줄이라고 호소하는 발리에 남작—— 피피의 아버지이기도 한 파트리스 님의 불만과 크리스토프 님도 그걸 지지하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클레망 님을 몰아붙이기엔 부족합니다.

어설프게 손을 댔다간 도마뱀 꼬리 자르듯 파트리스 님만 처벌받고 끝나겠죠.

하지만 정황증거로는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아버님은…… 체포되려나.”

“인신매매는 변명의 여지없는 중죄. 결코 놓칠 수 없어요. 반드시 붙잡겠어요.”

“……그렇구나.”


침대 위에서 뒤척이는 기척이 있었습니다.

저는 몹시도 면목 없는 심정으로 말을 이었습니다.


“카트린, 당신인 이 일에 대해서 알고 있었어요?”

“아니— 전혀. 하지만 오빠는 알고 있었구나—. 몰랐던 사람은 나 혼자 뿐인가—.”

“그 점을 꼭 감안할게요.”

“고마워—.”


이깟 말만으로 대체 무슨 위로가 될까요.

카트린이 처한 상황을 고려하면 도저히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당신만큼은 감형을 받도록 최선을 다해 탄원할 생각이에요.”

“그런 건 안 해도 괜찮아—.”

“괜찮을 리가 없잖아요! 그도 그럴게 당신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라—.”

“……카트린?”


갑자기 튀어나온 자조적인 말투에 불안을 느낀 저는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침대 위를 살펴보았습니다.

카트린은 바르게 누워있는 자세라 표정을 알 수 없었습니다.


“설마 당신도 인신매매에 뭔가 연관되어 있는 건가요?”

“아니, 그 점에 대해선 정말로 결백해.”

“그렇다면——.”

“하지만 어떤 의미로는 그것보다 더 무거운 죄를 저지르고 있으니까.”

“그 말은…… 대체……?”


제가 묻자 카트린은 저를 향해 뒤척이듯 몸을 돌렸습니다.

간신히 볼 수 있게 된 카트린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느긋하고 태평한 표정——이 아니었습니다.


“카트린…… 당신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예요.”

“……아하하, 역시나 심한가—?”

“얼굴이 창백하다고요.”


말투는 여전히 그대로지만 무리하고 있다는 게 뻔히 눈에 보였습니다.

얼굴은 창백하고 시선도 불안한 듯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습니다.

카트린이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워하다니 대체—?


“있지, 클레어 짱.”

“뭔가요.”

“클레어 짱은 다시 돌이키고 싶은 과거가 있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저는 카트린이 어떤 의도에서 물은 건지 살폈습니다.


“됐으니까 대답해줘—.”

“……그야 물론 있어요. 잔뜩.”

“그중 첫 번째를 꼽으라면—?”

“이미 다 알면서 묻지 말아줬으면 해요.”

“……그렇지.”


어머님과 화해하지 못한 채로 사별하게 된 일—— 저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과거의 추억입니다.


“있잖아, 나한테도 돌이키고 싶은 과거가 있어—.”

“……그건?”

“지금은 비밀—. 언젠가는 꼭 말해줄게—.”

“……그래요.”


하지만 어째서 지금 이런 타이밍에 그런 얘기를?

카트린이 품은 죄라는 건?

그리고 돌이키고 싶은 과거라는 게 뭘까요.


“……이래저래, 이제는 청산해야 할 순간이 왔다 싶어. 아버님도 오빠도…… 그리고 나도.”

“카트린…….”

“클레어 짱, 철저하게 수사해줘. 감형 탄원도 필요 없어. 저지른 죄에 맞는 죗값을 치를 수 있도록 처리해줘.”

“……알겠어요.”


저는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카트린이 너무나도 감정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표정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비통함.

만약 제가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대로 무너져버릴 듯한, 불안함이 느껴졌습니다.

오랜 옛날부터 친자매처럼 가까운 사이였던 카트린한테 이런 일면이 있었다니, 지금까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 가지 거짓말을 했습니다.

카트린을 포기하라니, 저로선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부탁해—.”


그렇게 말하며 카트린은 다시 한번 몸을 뒤척인 뒤, 새근새근 자는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 한마디만큼은 평소의 태연한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저도 다시 침대로 돌아와 누웠습니다.


“…….”


누구에게다 숨기고 싶은 비밀 한두 가지 정도는 있겠죠.

하지만 카트린이 품고 있는 비밀은 명백하게 이질적이고, 터무니없을 정도로 무거울 거라고 느꼈습니다.


“저기, 카트린.”“…….”


깊이 잠들어버린 걸까, 불러 봐도 침대 위에서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습니다.


“당신이 어떤 비밀을 품고 있는지는 몰라요. 하지만 그걸 저와 함께 나눌 수는 없는 건가요?”

“……”


들려오는 건 숨소리뿐.


“레이가 이런 말을 했어요. 기쁨은 함께 나누면 두 배, 고민은 나누면 절반이 된다고요. 당신이 품고 있는 무거운 짐을 제가 나눠 들 수는 없는 건가요?”

“…….”


역시나 대답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깊이 잠이 든 모양입니다.

저도 점차 수마가 밀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카트린…… 당신과 저는…… 친자매……처럼…….”


의식이 깊이 가라앉습니다.

깊은 수면 속으로 가라앉는 도중, 위에서 들려온 말은 제 귓가에 닿지 못했습니다.


“그 역할은 레이 짱한테 양보할게. 나한테는…… 그럴 자격이 없으니까.”


71. 정의와 신앙


왕궁의 특무관실.

저는 벽과 칠판에 덕지덕지 붙여놓은 자료들을 응시하면서 여태까지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습니다.

삿살 화산의 분화가 있을 거라는 소문이나 세인 님의 출생에 관한 의혹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와중에도 우리의 수사는 순조롭게 진행됐습니다.


——중간까지는요.


지금까지 열 명이 넘는 귀족들의 부정부패를 적발했고, 점차 수사도 중견급 귀족이나 고위 귀족에까지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수사 대상의 지위가 높아질수록 부패를 은닉하려는 은폐공작도 점점 교묘해졌습니다.

어느 수준까지야 증거를 잡아서 찔러볼 수 있었지만 정작 중요한 두 사람—— 사라스 님, 그리고 아버님을 몰아붙일 증거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샤르 후작—— 클레망 님에 관한 의혹은 마침내 마무리 단계까지 왔습니다.


(……그렇다곤 해도, 이건 엄청난 스캔들이에요.)


저는 레레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습니다.

클레망 님이 벌인 인신매매에 가담한 귀족은 열 명 이상.

그 중에는 피피의 가문인 발리에 가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신매매에 가담한 귀족들에 관한 증거는 거의 다 확보해뒀습니다.

이제 클레망 님이 도마뱀 꼬리 자르기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할 만한 결정타가 필요합니다.


“클레어 님, 어쩌시겠어요? 지금 상태로도 나름 어느 정도는 몰아붙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옆에 앉아있던 레이가 말했습니다.

그 말에 저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습니다.


“어느 정도 가지고는 한참 부족해요. 확실하게 클레망 님을 붙잡지 못하면 언제 또 다시 같은 일을 벌일지 알 수 없어요.”

“하, 하지만 더 많은 증거를 모으기는 좀처럼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릴리 추기경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로드 님이 건네준 각종 재무기록, 사법거래를 통해 얻은 여러 증언과 편지, 재무제표, 그 밖에도 각양각색의 증거물들.

모을 수 있을만한 증거는 거의 다 모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더 명확한 증거를 얻으려면 조금 더 무모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발리에 가문으로 가죠.”

“바, 발리에 가문?”

“피피 님의 가문이군요. 클레망 님의 인신매매가 벌어지는 영지의 실소유주기도 합니다.”

“그, 그랬었군요. 그, 그럼 발리에 남작을 체포하는 건가요?”


레이의 설명을 들은 릴리 추기경이 물었습니다.


“아니요, 파트리스 남작은 아직 체포할 수 없어요.”

“어째서인가요?”

“파트리스 남작은 클레망 님과 지나치게 가까워요. 지금 남작을 붙잡으면 클레망 님은 모든 죄를 남작에게 뒤집어씌우고서 자기는 발을 빼겠죠.”

“서, 성가시네요.”


클레망 님은 용의주도합니다.

여차하다 싶을 때 책임을 전가할 수단쯤이야 얼마든지 가지고 있을 게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무슨 용무로 발리에 가문에?”

“붙잡지는 않을 거지만 비밀리에 수사에 협력하도록 만들겠어요. 레이가 예전에 말한 사법거래라는 거예요.”

“그, 그렇군요!”


아까도 말했다시피 파트리스 님은 클레망 님과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습니다.

영지를 인신매매의 무대로 삼고 있는 것만 봐도 그는 유력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먼저 지금까지 확보한 증거를 들이밀고, 죄를 감면해주겠다는 조건으로 클레망 님을 옭아맬 증거를 내놓으라고 교섭해보면 결정타가 될 마지막 한 수를 확보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괜찮으신가요, 클레어 님?”

“뭐가 말인가요.”

“발리에 가문은 피피 님—— 클레어 님의 친구 분의 가문인데요?”

“……그게 어쨌다는 거예요.”

“사법거래로 어느 정도 감형을 받는다고 해도 인신매매는 중죄입니다. 발리에 가문이 귀족의 지위를 잃게 될 거라는 건 거의 틀림없습니다.”


레이는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친구를 잃게 되더라도 정의를 관철할 것이냐고.


“제가 그걸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이미 각오는 되셨던 거군요.”

“분명 저는 피피의 신뢰를 잃게 될지도 모르죠. 하지만 피피 또한 바우어 귀족의 일원이에요. 제가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니라면 피피도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겠죠.”


물론 피피는 저를 원망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설령 그렇다 해도 저는 제 책무를 다해야 합니다.

여기서 겁을 먹고 망설여서야 아버님을 추궁하겠다는 생각은 잠꼬대에 불과하니까요.


“……크, 클레어 님, 어째서인가요?”

“릴리 추기경?”

“크, 클레어 님은 어째서—— 친구의 가문이 몰락하게 되더라도 정의를 관철할 수 있는 건가요?”


저는 릴리 추기경의 질문을 처음 들었을 때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건 저한테는 의문을 가질 필요도 없이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릴리 님은 이렇게 묻고 싶은 거 아닐까요. 클레어 님의 입장이라면 얼마든지 주변 사람들의 편의를 봐줄 수 있을 텐데, 라고요.”

“그래서야 지금까지 우리가 죄를 밝혀냈던 부패 귀족들이랑 다를 게 없는걸요. 정의를 내건 자는 스스로의 정의를 실천할 의무가 있어요.”

“……그, 그 대상이 설령 자기 친아버지라도 말인가요……?”

“……그래요.”


한순간 망설인 뒤, 저는 릴리 추기경의 말에 끄덕였습니다.


수사를 진행한 결과, 사라스 님과 아버님이 부정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은 거의 틀림없습니다.

릴리 추기경은 어쩌면 지금도 주저하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이대로 친부의 죄를 까발리는 게 과연 정의인 것일까, 하고.


“릴리 추기경. 혹시 괴롭다면 당신은 수사에서 빠져도 괜찮아요.”

“…….”

“당신은 이미 충분히 수사에 공헌해줬어요. 뒷일은 레이와 저한테 맡기더라도 아무도 당신을 책망하지 않아요.”

“…….”


릴리 추기경의 표정에서 망설이는 기색이 보였습니다.

저는 그녀가 이대로 수사에서 손을 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여, 역시 릴리도 마지막까지 함께할게요.”


망설임을 떨쳐내는 것처럼 힘주어 고개를 휙휙 털어낸 다음, 릴리 추기경은 결의를 다진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괜찮겠어요? 당신은 귀족이 아니에요. 정의에 집착할 필요는——.”

“리, 릴리는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제가 말을 건네자 릴리 추기경은 부드럽게 말을 끊었습니다.


“시, 신앙이란 정의와 윤리를 가리키는 지침이라고 생각해요. 귀, 귀족이 스스로를 엄하게 다스리는 것처럼 신앙을 가진 자도 그 신앙이 가리키는 삶의 방식을 좇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릴리 추기경은 어떤 의미로는 귀족과 정령교도가 똑같다고 말했습니다.


“게, 게다가 릴리는 아니지만 아버님은 바우어 귀족이에요. 다, 다시 말해 아버님에겐 정의를 실천할 의무가 있어요. 그, 그런 아버님이 죄를 범하고 있다면야 누구보다도 릴리가 나서서 아버님에게 간언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릴리 추기경……”


비통함에 가까운 표정으로 결의를 드러내는 릴리 추기경을 위로하듯 레레어가 손에 뺨을 비볐습니다.

그런 레레어를 본 릴리 추기경은 문득 굳어있던 표정을 부드럽게 풀면서 이어서 말했습니다.


“죄, 죄는 반드시 심판받아야만 해요. 시, 신께서는 모든 걸 지켜보고 계세요. 아, 아버님의 죄를 제 손으로 추궁하는 것도 신께서 릴리에게 내린 시련이라고 생각해요.”


그 목소리에 더 이상 아까 같은 망설임은 없었습니다.

릴리 추기경은 도저히 기가 센 성격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놀라울 정도로 결벽하고 청렴한 본바탕을 가지고 있습니다.

레이를 사이에 둔 연적이긴 하지만 저는 그녀의 삶의 방식에 깊은 공감을 느꼈습니다.


“알겠어요. 그러면 부디 마지막까지 함께 해주세요.”

“네, 네에!”

“레이, 증거자료를 정리해줘요. 그 작업이 끝나는 즉시 발리에 가문으로 가겠어요.”

“알겠습니다.”


괴롭지 않다고 말하면 거짓말입니다.

피할 수만 있다면 최대한 피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가 귀족인 이상, 이젠 물러날 수 없습니다.


(피피, 용서해달라고는 말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저에게 다른 삶의 방식을 택하는 건 불가능해요.)


이상을 실현하는 귀족이 되어라—— 어머님의 가르침을 되새기면서도, 저는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게 얼마나 큰 고통을 수반하는 일인가를 곱씹었습니다.


72. 아빠와 딸


“변명할 말은 있나요, 파트리스 남작?”

“…….”


발리에 남작가 저택을 찾아간 레이, 릴리 추기경, 그리고 저. 우리는 응접실에서 당주인 파트리스 발리에 남작과 대면하는 중입니다.

우리가 들고 온 인신매매에 관한 증거물을 제시하자 파트리스 남작은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입을 꾹 다물었습니다.


“파트리스 님, 침묵도 긍정으로 간주할 건데요? 그만 단념하고 자백하시면 어떨까요?”

“저, 저희는 파트리스 님의 죄를 감면해드릴 용의가 있어요. 죄, 죄를 인정하고 클레망 님의 수사에 협력해주실 수는 없을까요?”


레이와 릴리 추기경도 한마디씩 거들었습니다.

흔히 당근과 채찍이라고 표현하는데 딱 그 말이 어울렸습니다.

어지간한 귀족은 이 시점에서 백기를 듭니다.

하지만 파트리스 남작은 여전히 침묵에 잠겨있었습니다.


“파트리스 남작, 침묵은 금이라고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그렇지 않아요. 그 정도는 알고 있겠죠?”

“…….”

“인신매매가 실제로 일어난 곳은 발리에 영지입니다. 이대로 가면 파트리스 님이 모든 죄를 뒤집어쓰게 될 텐데요?”

“나, 남작 혼자 덤터기를 써도 괜찮은 건가요? 죄의 감면이 없으면 파트리스 님뿐만 아니라 부인 분이나 피피 님도——.”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어.”


릴리 추기경의 말을 끊는 것처럼 파트리스 남작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남작…….”

“죄는 인정하지. 모든 건 내가 꾸민 일이야. 어떤 처벌이든 달게 받아들이겠어.”


여전히 고개를 수그리고 있어서 표정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남작은 쥐어짜내는 목소리로 모든 걸 수용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결과, 남작 부인과 피피까지 말려들게 되더라도 상관없다는 거군요?”

“아내와 피피에게는 면목이 없어. 나는 사형당할 테고, 발리에 가문도 멸문당하겠지.”

“네, 그렇게 되겠죠.”

“뒤에 남을 가족들은 고생하게 될 거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어.”


파트리스 남작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소심한 성격이라고 평판이 자자한 사람입니다.

대대로 이어진 가문이 자기 대에서 무너지고, 자신도 처형될 거라는 말을 듣고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남작은 완고하게 입을 다물었습니다.


이걸 어떻게 해야 좋을까 싶어서 생각에 잠겨 있었더니 갑자기 응접실 문이 벌컥 열렸습니다.


“아버님!”


난폭한 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 온 사람은 피피였습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기색인 걸로 봐서, 아마 지금까지 나눈 대화를 엿듣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 방은 방음 설비가 되어 있을 텐데 대체 어떤 수법을 쓴 걸까.

아뇨,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겠죠.


방에 들어오자마자 힘찬 발걸음으로 자기 아버지를 향해 다가간 피피는 그대로 어깨를 붙잡고 흔들며 말했습니다.


“왜 가만히 계시는 건가요, 아버님! 그냥 다 털어놓으면 되잖아요! 전부 아샤르 후작이 시킨 짓이라고요!”

“입 다물어라, 피피.”


따져대는 피피를 쳐다보지도 않고서 여전히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건 이상하잖아요! 대체 왜 아버님 혼자서 죄를 뒤집어 써야하는 건가요?! 솔직하게 말하면 죄를 감면받을 수 있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전부——.”

“피피!”

“읏……!”


남작은 강한 어조로 펄펄 뛰는 피피의 말을 끊었습니다.


“증언은 불가능해. 나 혼자서 뒤집어쓰겠어. 그걸로 충분해.”

“아버님…… 어째서……!”

“클레어 님, 지금까지 제 딸과 친하게 지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다는 점을 진심으로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남작…… 그걸로 괜찮은 건가요……?”

“네.”


남작은 고개를 들었습니다.

무언가를 단단히 각오한 사내의 표정이었습니다.


“아버님은 바보…… 바보야……!”


피피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저는 도저히 보고 있기 힘들었지만 이것도 일입니다.

남작의 결심은 확고해 보이니 증거를 캐내는 건 일단 포기하고 남작을 체포하기로 했습니다.


그때——.


“너무 책망하지 말아줄 수는 없을까요, 피피 님. 남작이 굳건하게 입을 열지 않는 건 당신과 부인을 위해서니까요.”


새롭게 등장한 부드러운 목소리가 응접실에 울려 퍼졌습니다.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거기에 서 있는 사람은 의외의 인물이었습니다.


“크리스토프 님…….”

“클레어 님, 남작을 체포하는 건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사정은 제 쪽에서 설명하도록 하죠.”


크리스토프 님은 사용인 한 명을 구속하고 있었습니다.

무언가 눈치챈 모양인지 레이가 다가가 그 사람을 넘겨받자, 크리스토프 님은 천천히 피피에게 다가가 그녀를 훌쩍 안아 올려서 남작 옆에 앉혔습니다.


“크리스토프 님, 무슨 말씀이신가요? 아버지가 협박을 당했다니, 그리고 엄마와 저를 위해서라니.”

“그 말 그대로입니다. 남작은 제 아버지—— 클레망 후작한테 협박당하고 있는 겁니다. 순순히 말을 듣지 않으면 아내와 딸의 목숨은 없다면서요.”

“——?!”


피피는 깜짝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옆에 있는 부친을 바라봤습니다.

남작은 다시 고개를 푹 숙인 채 몸을 떨고 있었습니다.


“애초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나요? 소심하기로 유명한 남작이 이런 중범죄를 저지르다니.”

“그건 저도 의아하게 생각하던 참이었어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걸요.”


피피와 친한 사이가 된 이후로 남작과도 오래 알고 지냈습니다.

저는 그가 어떤 성격인지 잘 압니다.

어떻게 생각해봐도 이런 짓에 발을 들일 사람은 결코 아닙니다.


“모든 게 아버지의 계략입니다. 리스크는 전부 파트리스 남작한테 떠넘기고, 자신은 이익을 갈취한다—— 제 아버지지만 정말 최악의 남자죠.”


크리스토프 님은 표정도 말투도 태연했지만 말하는 내용은 신랄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저 사용인은 아버지의 수하입니다. 그는 만약 남작이 배신할 경우 남작 부인과 피피, 당신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어요.”

“——그럴 수가……!”

“사실이에요. 그래서 파트리스 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겁니다.”


클레망 님다운 비열한 수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피피 님, 당신의 아버님은 정말 훌륭한 분입니다. 가족을 인질로 잡혀서 원치 않는 인신매매에 손을 거들어야하는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피해자를 줄이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남작은 저와 협력해서 붙잡힌 사람들을 몰래 도망치게 해주고 있었어요.”

“아버님이……?”

“네. 게다가 그뿐만이 아닙니다. 남작은 어떻게든 제 아버지의 악행을 막으려고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한때 떠들썩했었던 신문기자 실종 사건도 남작이 꾸민 연극입니다. 그렇죠, 남작?”

“…….”

“맹세컨대 남작은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아버님을 자랑스럽게 여겨주세요.”


크리스토프 님의 말을 들으며 피피는 남작을 바라보았습니다.

딸이 보내는 무언의 질문에 남작은——.


“피피…… 말하지 않아서 미안하다.”

“으……으흑…… 으아아아앙……!”


아버지가 무죄라는 걸 알게 되어서일까, 혹은 단순히 안도감 때문일까, 피피는 남작한테 매달려서 엉엉 울었습니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어요, 크리스토프 님? 전부 술술 자백하셨는데요?”

“괜찮습니다. 아버지도 슬슬 업보를 돌려받을 때죠. 오히려 좀 더 빨리 이렇게 했었어야 합니다.”

“협력에 감사드려요, 크리스토프 님.”

“아뇨, 수고를 끼쳐드렸습니다, 클레어 님. ……남작, 그것을.”

“네.”


크리스토프 님의 재촉에 남작은 부드럽게 피피를 떼어놓고서 잠깐 방을 다가더니, 종이 다발을 품에 안고서 돌아왔습니다.


“아샤르 후작가가 인신매매에 관여한 증거와 거래 명세서입니다.”

“——!”

“이게 있으면 아무리 아버지라도 빠져나갈 수 없겠죠.”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고 믿었던 보람이 있습니다. 클레어 님, 이걸 맡기겠습니다.”

“네, 반드시 기대에 부응하는 결과를 보여드리겠어요.”


남작한테 건네받은 자료에는 인신매매에 관한 모든 내용이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아버지도 보는 눈이 없군요. 하필이면 파트리스 남작한테 범행에 가담할 걸 종용하다니.”

“저는 소심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만약을 위한 대비는 잊지 않지요.”

“진짜 소심한 사람은 이렇게 날카로운 비수를 준비하지 않아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그 대사는 피피가 자주 입에 올리는 말버릇이었습니다.


“고마워요, 남작, 크리스토프 님. 이걸로 클레망 님을 몰아붙일 수 있어요. 레이, 릴리 추기경, 드디어 체크메이트군요.”

“네, 열심히 해보죠, 클레어 님.”

“네, 네에!”


73. 결전 전야


“그렇게 됐으니 내일 음악제에서 클레망 님을 체포할 거예요.”

“……그렇구나—. 마침내 아버님도 죗값을 치를 때인가—.”


왕국이 주최하는 음악제가 하루 앞으로 다가온 밤.

저는 카트린과 함께 마지막으로 의논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발리에 남작가를 찾아갔다는 사실도 클레망 님은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인지 지금은 종적을 감춘 상태입니다.

아마도 증거인멸과 책임전가를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중일 거라고 짐작하지만 현재 어디 있는지는 아들인 크리스토프 님도 모른다고 합니다.


하지만 클레망 님은 음악제의 기획책임자입니다.

내일 음악제에는 반드시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우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클레망 님을 고발할 계획이었습니다.


“꼭 조심해야해. 아버님은 정말로 끝까지 발버둥 칠 사람이니까—.”

“네, 알고 있어요.”

“응, 그럼 괜찮겠지—.”


카트린은 살포시 웃었습니다.

저로서는 그 웃음을 보니 도무지 견디기 힘든 심정이었습니다.

내일 클레망 님을 체포하게 되면 아샤르 후작가는 끝장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카트린 또한 길거리에 나앉게 되겠죠.

그걸 다 알고 있으면서도 카트린은 이렇게 웃고 있는 겁니다.

——어째서일까.


“카트린, 혹시나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뭐가—?”

“당신이 슬픈 표정을 짓는다고 해서 제 결의가 흔들리는 일은 없어요. 그러니까 저를 위해 억지로 웃으려고 하지는 말아주세요.”

“아하하……. 다 들켰나—. 클레어 짱한테는 못 당하겠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카트린의 표정은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카트린. 당신, 우리 가문으로 오지 않겠어요?”

“클레어 짱,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카트린은 재미있는 농담이라며 웃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디까지나 진심입니다.


“양자결연을 맺는 방법도 있어요. 아샤르 가문의 여식이니 자격은 충분하잖아요?”

“그런 걸 도르 님이 허락할 거라 생각하긴 힘들어—. 적에게는 가차 없는 걸로 유명한 분이잖아—?”


확실히 아버님은 한번 적대한 상대에겐 가혹합니다.

그게 아버님이 남들에게 두려움을 사는 이유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설득하겠어요.”

“어떻게—?”

“어떻게 해서든.”

“무리야, 클레어 짱. 정적이자 범죄자로 전락한 상대의 딸에게 동정을 베풀었다는 소문이 퍼졌다간 프랑소와 가문의 이름에도 흠집이 날 거야—.”

“배포가 넓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질지도——.”

“클레어 짱.”


어떻게든 말을 이어가려던 저를 부드럽게, 그러면서도 단호하게 제지했습니다.


“지금은 괜한 생각은 접어두고 내일 확실하게 우리 아버님을 궁지에 몰아넣을 것. 그것만 생각하자, 응?”

“……알겠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저는 손톱만큼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카트린을 구해낼 방법은 없을까.

귀족으로 남긴 힘들어도 평민으로, 아니면 수녀로 살아남을 방법은 없을까, 계속 생각을 이어갔습니다.


“있잖아, 클레어 짱.”

“뭔가요.”

“우리가 알고 지낸지도 얼마나 됐더라—?”

“벌써 10년은 됐네요.”

“그렇구나—. 길면서도 짧았던 느낌…….”


그렇게 과거형으로 표현하지 말아줬으면 싶습니다.


“오히려 지금부터가 시작이에요. 당신처럼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까요.”

“클레어 짱이 그런 소릴 해—? 클레어 짱도 참 어지간하다 싶은데—?”

“말했다 이거죠!”

“꺄악, 항복항복! 클레어 짱, 내가 졌어!”

“어휴 참…….”


한바탕 날뛰고 나자 갑자기 침묵이 내려앉았습니다.

우리 사이니만큼 침묵 정도로 거북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만, 이때는 어째서인지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다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제가 조급함에 쫓기듯이 뭔가 말을 꺼내려고 하는 순간,


“클레어 짱, 사탕 하나만 줄래?”


카트린이 먼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습니다.


“또 이런 시간에. 당신은 용케도 충치가 안 생기네요?”

“에헤헤—.”

“사탕말이죠.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클레어 짱한테도 한 개 줄게—.”

“필요 없어요.”

“부탁이야. 같이 먹자. 마지막일지도 모르잖아—?”

“……카트린…….”


목 끝까지 반론할 말들이 솟구쳤지만 저는 꾹 참았습니다.

카트린의 책상 위에 있는 캔디 상자에서 캔디 두 개를 꺼내 하나는 카트린한테 건네고 하나는 제 입에 넣었습니다.

리코리스 특유의 독특한 풍미가 입 안에 가득 퍼집니다.


“이제 한 개 남았네요.”

“그러게—.”

“내일 하루 동안 착한 아이로 있으면 새 걸 사주겠어요.”

“나쁜 아이로 있으면—?”

“제가 먹어버릴 거예요.”

“그거 참 큰일이네—. 착한 아이로 있을게—.”

“꼭이에요.”


결코 제 취향이라고 말하기는 힘든 맛의 사탕을 입 안에 굴리며, 카트린과 함께 주고받는 가벼운 대화에서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그때 갑자기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울렸습니다.


“저입니다.”

“에마? 무슨 일인가요, 이런 시간에?”

“아, 내가 불렀어. 내일 일 때문에—.”

“내일요? 그게 무슨 소리——.”

“에마, 들어와.”

“실례합니다.”


방에 들어온 에마는 아직도 메이드복 차림이었습니다.


“클레어 짱, 나는 괜찮으니까 부디 에마를 잘 부탁할게—.”

“당신은 또 그런 소릴——.”

“부탁이야.”


카트린은 평소의 미덥지 못한 얼굴이 아닌 진지한 표정을 짓고서 말했습니다.

저는 카트린이 하는 부탁에 약합니다.

카트린도 그걸 다 알면서 하는 말입니다.


“하아……, 알겠어요. 다음 일자리를 알아봐드릴——.”

“거절하겠습니다, 아가씨.”


한숨 섞인 어조로 승낙하려고 하는 제 말을 끊으며 에마는 또렷한 거절 의사를 드러냈습니다.


“에마……?”

“제가 섬길 분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 카트린 아가씨뿐입니다.”


에마는 언제나처럼 고지식한 눈빛과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카트린에게 선언했습니다.


“에마…… 마음은 기쁘지만 내일이 되면 나는 이제 너를 고용할만한 여유가 없어져—.”

“상관없습니다. 아가씨를 섬길 수만 있으면 급료 같은 건 필요 없어요.”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응? 에마. 이해해줄래?”

“싫습니다.”


한 발짝도 양보하려고 들지 않는 에마를 보며 난처했는지 카트린이 도와달라는 눈빛으로 제 쪽을 쳐다봤습니다.


“에마, 당신은 어째서 그렇게나 카트린한테 집착하는 건가요?”

“아가씨가 저를 거두어주시지 않았다면 저는 오래전에 객사했을 겁니다. 제 목숨은 아가씨의 것입니다.”


에마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는 슬럼가에 거주했던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원래는 다른 나라에서 나름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정쟁에서 패하고 몰락했다나요.

이리저리 떠돌다가 왕국에 도착한 뒤에 도둑질을 하다가 붙잡혔고, 마구잡이로 폭행을 당하던 상황에서 카트린이 끼어들어 구해줬다고 합니다.

그 일이 있고부터 에마는 카트린의 전속 메이드가 됐습니다.

처음에는 클레망 님의 명령만을 따르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에마가 사실은 진심을 다해 카트린만을 생각해서 한 말이었다고 합니다.


“쿡쿡…… 참 곤란하게 됐군요, 카트린?”

“웃지 말아줘, 클레어 짱도 에마를 설득 좀 해줘—.”

“소용없습니다.”

“에마도 참…….”


어찌할 바를 모르는 기색인 카트린을 보니 웃음이 멎질 않았습니다.


“자, 카트린. 포기하고 앞으로도 계속 살아갈 방법을 고민해보세요. ……아니, 저도 같이 고민하게 해주세요.”

“클레어 짱…….”

“당신에겐 친구도 있고, 당신만을 섬기는 메이드도 있어요. 우리의 신뢰를 배신하지 말아줘요, 알겠죠?”

“……하아, 다들 고집쟁이라니까.”


항복이라는 듯이 천장을 우러르는 카트린이었지만 어딘지 기뻐보였습니다.

해결해야 할 문제는 여전히 산더미였지만 저는 왠지 모르게 모든 게 잘 풀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게 전부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 채로.


74. 음악제


바우어 음악제는 국왕이 직접 주최하는 국제적 음악 이벤트입니다.

로세이유 폐하를 비롯한 왕족 분들도 참석합니다.

음악제에 출연하는 음악가는 바우어뿐만 아니라 인접국인 아파라치아나 스스를 포함해 서쪽에 있는 로로에서도 초청을 받아 옵니다.

높은 권위를 가진 바우어 음악제에 초청받았다는 건 음악가에게 있어선 더할 나위 없는 명예임과 동시에 장래의 성공을 보장하는 커리어입니다.


“그런 멋진 기회를 이런 식으로 망치게 된 점을 먼저 사과드리겠어요, 피피, 로렛타.”


저는 무대 의상으로 갈아입은 친구들에게 사과하며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런 제 모습에 피피와 로렛타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습니다.


“고개를 들어주세요, 클레어 님!”

“맞아요! 그야 이번 음악제는 엉망으로 끝날지도 모르지만 우리에겐 아직 다음 기회가 있으니까요.”


고개를 들자 눈앞에는 “반드시 다시 한번 실력으로 이 무대에 서겠어요”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믿음직스러운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처음 만났을 무렵의 못미더운 모습은 씻은 듯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애초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도 전부 클레망 님 탓이잖아요.”

“그래요. 클레어 님한테는 잘못이 없어요.”

“두 사람 다, 고마워요. 협력해줘서 고마워요.”


클레망 님이 모습을 드러낼 거라 짐작되는 순간은 음악제 마지막 표창식이 열리는 타이밍입니다.

표창식 때는 로세이유 폐하도 친히 자리하시기 때문에 경비도 엄중할뿐더러 엄격한 소지품 검사도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극히 일부의 인물만이 무대에 다가갈 수 있다는 점이야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음악제 참가자인 두 사람의 협력이 꼭 필요했습니다.


“일단은 둘 다 연주에 집중해주세요.”

“네!”

“즐기고 오겠습니다!”


◆◇◆◇◆


음악제가 시작됐습니다.

음악제 회장인 왕립 콘서트홀은 여러 나라에서 온 초청객들로 북적였습니다.

누구 하나 이제 곧 있을 혼란에 대해선 알 길 없이 음악가들이 자아내는 극상의 연주에 심취한 모습입니다.


“클레어 님, 슬슬 로렛타 님과 피피 님 차례군요.”

“알고 있어요.”

“두, 두 분 다 연주에 집중하셨으면 좋겠는데요…….”

“분명 괜찮을 거예요.”


공연 순서표를 보며 말하는 레이와 걱정스러운 기색인 릴리 추기경한테 적당히 대답을 돌려주면서, 저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콘서트 홀 안을 관찰했습니다.


(……경비병 수가 너무 많아요. 짐작컨대 전부 아샤르 후작가의 사병들이겠죠. 클레망 님,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요……?)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치는 와중에 드디어 피피와 로렛타가 무대 위에 등장했습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바랐던 꿈을 이번 음악회 자리에서 실현했습니다.


——저는 언젠가 로렛타의 피아노와 함께 바이올린 콘서트를 여는 게 꿈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웃던 피피는 지금 이곳에서 연주할 자세를 잡으며 로렛타와 마주 웃고 있습니다.

로렛타도 피아노 앞에 앉고서 피피의 신호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연주가 시작됐습니다.

무지개색 팔레트를 가지고 있다고 호평이 자자한 로렛타의 선명한 피아노 음색에, 피피의 금욕적일정도로 정확한 초절기교 선율이 더해집니다.

특징으로 따지면 두 사람의 음색은 대척점에 있는데도, 신기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하나로 어우러져 새로운 음색을 창조해냈습니다.


(피피, 로렛타, 정말로 훌륭한 연주예요.)


관객들 중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만큼이나 두 사람의 연주는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놨습니다.


연주는 시간으로 따지면 약 10분 정도였겠죠.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협주곡으로 치면 일반적인 길이입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 마음으로 생각했을 겁니다.

좀 더 좀 더—— 계속해서 듣고 싶다고요.

마지막 한 음이 잦아들자, 회장이 떠나갈 것처럼 성대한 박수갈채가 울려 퍼졌습니다.


“브라보—!”

“새로이 등장한 천재들에게 축복 있으라!”

“아주 근사했어—!”


아낌없는 찬사가 무대 위의 두 사람에게 쏟아졌습니다.

저도 손이 아플 정도로 열렬한 박수를 보냈습니다.


“저, 음악에는 문외한이지만 피피 님과 로렛타 님이 굉장하다는 건 잘 알겠습니다.”

“리, 릴리도요.”

“당연하죠. 그야——.”


저는 자랑스러운 기분으로 두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그야 두 사람은 바로 저, 클레어 프랑소와의 친구인걸요?”


◆◇◆◇◆


착착 순서에 따라 진행되어, 마침내 마지막 표창식만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단상에는 이번 음악회에서 연주를 피로한 음악가들이 전부 올라와 있습니다.

객석에서 다시 한번 음악가들을 위한 찬사와 박수가 터져 나옵니다.

귀빈석에는 세인 님을 대동한 로세이유 폐하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그러면 이번 음악제의 기획 책임자이신 클레망 아샤르 님의 한 말씀이 있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에 회장 안이 조용해졌습니다.

제가 레이와 릴리에게 눈짓으로 신호하자 두 사람도 고개를 끄덕입니다.

주의 깊게 단상을 가만히 응시했습니다.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지고, 무대 끝에서 한 사람의 노신사가 지팡이를 짚은 채 나왔습니다.

클레망 님입니다.

하지만 아직 방심할 수 없습니다.

지금 단상에 나타난 사람은 얼굴만 비슷한 대역일지도 모르니까요.


“국왕 폐하께 친히 자리하신 어전에서 훌륭한 음악을 선보일 수 있었다는 점에 기쁨을 감출 수 없습니다. 또한 이 자리에 참가해준 제군들에게 진심어린 칭찬을 보내고 싶군. 이번 영광스러운 바우어 음악제에——.”


낭랑한 목소리로 축사를 읽는 목소리도 틀림없는 클레망 님 본인의 것.

이만큼 확인했으면 이젠 괜찮겠죠.

저건 클레망 아샤르 후작, 본인이 확실합니다.


“이상으로 기획 책임자로서의 인사를 마치겠다. 끝까지 들어줘서 고맙다.”

“이의 있어요!”

“?!”


그 커다란 외침은 클레망 님이 올라가 있는 단상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제 아버님, 파트리스 발리에에게 범행을 교사했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했던 중죄인에게 영예로운 음악제의 축사를 읊을 자격은 없어요!”


목소리의 주인은 피피였습니다.

피피는 홀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목소리로 클레망 님의 죄상을 말했습니다.


“누군가 했더니 발리에의 여식인가……. 어리석은. 무슨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건가.”

“정신 나간 소리가 아니에요!”


되도 않는 변명으로 도망치기 전에 저도 객석에서 일어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클레망 님은 제 모습을 보자마자 노골적으로 혀를 차며 노려봤습니다.

하지만 그날, 아샤르 저택에서 무력감에 몸을 떨던 그때의 저와는 달라요.

저에겐 든든한 친구들과 동료들, 그리고 레이가 있으니까요.


“프랑소와 가문의 영애까지. 바우어 귀족도 땅에 떨어졌군. 생트집에도 정도가 있다.”

“이걸 보고도 계속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을까요?”


저는 화속성 마법인 라이트를 썼습니다. 그러자 무대의 커튼 위에 레이의 도움을 받아 수집한 클레망 님의 인신매매 범행에 관한 개요가 투영됐습니다.


“클레망, 해명할 말이 있는가?”


귀빈석이 있는 로세이유 폐하가 클레망 님에게 추궁하듯 물었습니다.

클레망 님은 침착함을 잃고서,


“저로선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저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일이니 아마 도르 일당이 저를 모함하고자——.”

“말장난은 치워라. 지금 제시된 증거는 그런 모함이나 트집이 아니라는 게 자명하다.”

“…….”


폐하의 단호한 말에 클레망 님은 침묵에 잠겼습니다.


“변명은 감옥에서 듣도록 하지. 클레망을 체포하라.”


폐하의 명령에 경비병들이 클레망 님을 포박하려고 움직—— 이지 못했습니다.


“……뭘 하고 있나. 클레망을——.”

“여기까지인가.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명을 따라 전향 선물로 삼도록 할까.”


클레망 님—— 아니, 클레망이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를 치켜들더니 지팡이 끝을 로세이유 폐하를 향해 겨누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병사들이여. 바우어 국왕, 로세이유의 목을 바쳐라.”


75. 결착


“헛된 발버둥은 그만두세요, 클레망!”

“건방진 소리 하지마라, 계집. 큰 틀에서 보면 궁지에 몰린 게 맞지만 지금 이 국면만 놓고 보면 이 몸이 유리하지. 네가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겠느냐?”

“……큭!”


당했습니다.

우리는 확실한 증거를 들이밀어서 유죄임을 밝히면 모든 게 끝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얕은 생각이었어요.

클레망은 로세이유 폐하의 목숨을 노리고 있고, 그걸 전향 선물로 삼아 타국으로 몸을 빼려는 속셈인 모양입니다.

폐하의 목을 선물로 받고 기뻐할만한 상대라면 그건 분명——.


“클레망, 당신 제국의 앞잡이였군요!”

“나를 얕보지 마라 계집. 제국이야 발리에 가문과 마찬가지로 내 거래 상대에 불과해. 그걸 앞잡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면 안 되지.”

“클레어 님, 물러나주세요!”

“이거 놓으세요, 레이! 폐하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는데 잠자코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어요!”


폐하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이 자리에는 주변 나라에서 초청을 받아 온 저명인사들과 문화 예술계 인물들, 그리고 정치인들도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클레망을 붙잡느니 마니가 문제가 아닙니다.


“폐하, 이곳은 제게 맡기고 도망쳐 주십시오.”

“세인…….”

“폐하께선 이 바우어에 없어선 안 될 분. 클레망 같은 비열한 자에게 옥체가 상하셔서는 안 됩니다.”

“……세인 그대는 혹시——.”

“자, 어서.”

“……뒤를 맡기마.”


귀빈석에서는 세인 님이 로세이유 폐하를 피난시키려고 하는 모양입니다.

몇 안 되는 근위병들은 대부분 폐하의 호위로 돌리고서, 세인 님 본인은 자신의 실력으로 스스로를 지키겠다는 생각인 걸로 보였습니다.


“……정말이지, 세인 님도 참 대단하신 분이라니까요!”


다가오는 클레망의 사병들을 적당히 죽지 않을 만큼 불로 태워주면서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세인 님은 아마 요즘 들려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의 출생의 비밀에 의문을 품고 있는 거겠죠.

다시 말해 로세이유 폐하가 진짜 친아버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있을 게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보다시피 세인 님의 선택은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세인 님이 폐하에게 바치는 경애는 혈연을 넘어서는 깊고 커다란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그에 비해서 저 자는 한심천만이군요!”


클레망은 무대 위에 올라가 있던 음악가들을 인질로 잡은 채로 단상 위에 서서 강 건너 불구경마냥 여유로운 태도입니다.

직접 움직이는 건 사병들뿐.

사병들도 아마 클레망한테 무언가 약점을 잡혔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 느낌이 없었더라면 인정사정없이 전력을 다해 불태워버렸겠죠.


“잘도 버티는구나, 계집들. 하지만 그것도 끝이다. 세인 왕자, 당신도 마찬가지야.”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무대를 보자 클레망은 로렛타에게 단검을 들이대고 있었습니다.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면 이 꼬맹이를 죽이도록 하지.”

“어디 해보세요. 그 순간 당신을 잿더미로 만들어드리겠어요.”

“할 수 있을까? 이 아이를 방패로 삼더라도?”

“……이 비열한.”

“이건 비열이 아니라 노련하다는 거다.”


깊이 파인 주름을 일그러트리며 웃는 클레망의 모습은 추악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원래 같으면 로렛타 같은 실력자가 저렇게 쉽게 인질로 붙잡힐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무기 하나 없는 맨손입니다.

하다못해 소지품 검사를 피해서 마법지팡이 하나만이라도 갖고 있었더라면…….

지금 클레망이 단검을 가지고 있는 것도 몰래 반입해 들여온 거겠죠.


“클레어 님,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클레망을 공격해주세요.”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거예요.”

“클레어 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잃더라도 괜찮습니다.”

“괜찮을 리가 없잖아요! 반드시 구해줄 테니까 당신은 얌전히 있으세요.”

“얌전히 있을 수는 없어요!”

“?!”


비통함을 담은 절절한 외침에 살짝 동요했습니다.


“역시 계집은 계집에 불과하구나, 밀리아의 딸. 크글렛의 여식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 눈치로군.”

“……당신은 알고 있다는 건가요?”

“모르겠다면 알려주지. 이 녀석은 너를 좋아하는 거라고. 그것도 눈치채지 못하는 거냐.”

“?! 로렛타…… 당신…….”

“죄송합니다, 클레어 님. 저 같은 게 클레어 님을 좋아하게 되다니. 그래도 당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저는……”


로렛타는 그 말과 함께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그늘이 진 탓에 보이지 않는 얼굴에서 반짝이는 물방울이 떨어져 융단을 적십니다.


“자아, 그만 포기해라. 뭐 어떠냐, 어디까지나 이 상황에선 비긴 거 아니냐. 크게 보면 이미 내 패배야—— 이 나라에서는 말이지만. 네 녀석과는 언젠가 다음에 결판을 내주마.”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평민, 네 녀석도 할 수 있는 건 없겠지.”

“저는 로렛타 님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습니다. 상황에 따라선 세인 님이나 로세이유 폐하도요.”

“레이?!”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꺼내는 레이를 향해 저도 모르게 눈을 부릅떴습니다.


“그러니 더욱 그렇지. 네 녀석의 우선순위는 프랑소와의 계집이겠지?”

“늙어서 노망이 든 것 치고는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렇고말고. 여기서 나를 붙잡더라도 프랑소와가의 계집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죽는다면 네 녀석이 결정적으로 신뢰를 잃게 될 거라는 것도 잘 알지.”

“……썩을 할아범.”

“말했을 텐데. 이게 노련함이라는 거다.”


레이마저도 저 노인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는 걸까요.

뭔가…… 뭔가 좋은 방법은 없는 건가요……!


“다들 그대로 얌전히 있도록. 병사들이여 도망친 로세이유를 쫓아라. 나는——”

“자, 이렇게 됐으니 슬슬 괜찮겠지? 피피.”

“그래요, 로렛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갑자기 무슨 소릴까, 하는 생각을 떠올린 그 순간——.


“천사의 포효(엔젤 하울링)!”


마치 질량을 띤 듯한 묵직한 중저음이 울려 퍼지자, 저를 포함한 이 자리의 모든 사람들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뭣…… 이건……!”

“네, 이번에야말로 체크메이트…… 인걸로 봐도 되는 걸까? 로렛타?”

“응.”


여전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그 이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클레망을 향해 로렛타가 다가가 옆에 있는 콘트라베이스의 현으로 포박했습니다.


“바, 발리에 가문의 계집…… 네 녀석, 대체 무슨 짓을……!”

“헤이트 크라이라는 기술이 있죠. 알고 계신가요, 클레망 님?”

“뭐, 뭣이라?”

“지금 건 악기로 헤이트 크라이를 재현한 마법이에요. 이 정도로 범위가 넓고 출력이 대단할 거라고는 저도 약간 예상 밖이었지만요.”


피피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어떤 수법이었는지 설명했습니다.

헤이크 크라이란 마물이 사용하는 위협용 포효로, 무방비 상태에서 당했을 경우 일시적으로 행동불능 상태에 빠집니다.

레레어의 엄마 슬라임이 사용했던 것과 똑같은 마법이군요.

피피는 그걸 모방해서 발현한 겁니다.


“그렇…… 다는 건, 그 악기는……?”

“네, 마도구예요. 살짝 위장을 가하긴 했죠.”


데헷, 하고 혀를 쏙 내미는 피피의 모습은 마치 장난에 성공한 어린아이 같았습니다.


“이런…… 이런 걸로…… 이 몸이…….”

“네, 끝이에요.”

“바보 같은……! 병사들, 뭐하고 있나! 빨리 일어서서 어떻게든 하지 못하겠나!”


클레망은 이 상황에서도 마지막 발버둥으로 마구 소리를 질렀지만 거기에 응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클레망이 붙잡힌 걸 보자, 사병들은 하나 둘씩 투항하기 시작했습니다.

약점을 쥐고 협박하는 방식으로밖에 사람을 다룰 줄 모르던 노인의 참으로 가련한 말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두 사람 다, 훌륭한 솜씨였어요!”


피피의 마법에서 풀려난 저는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가 두 사람을 껴안았습니다.


“아파아파! 아프다고요, 클레어 님!”

“그 정도는 참으세요. 그런 연기까지 하고는. 엄청 걱정했다고요.”

“연기요?”

“그 있잖아요, 저를 좋아한다느니 뭐니.”


그것도 당연히 연기였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더니,


“……하아.”

“뭔가요, 그 한숨은?”

“동정합니다, 로렛타 님.”

“그래…… 이 정도면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고 봐야겠네.”

“괜찮아, 로렛타한테는 내가 있잖아?”

“엑?”

“어?”

“네?”

“엣?”


그렇게 새로운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하려는 참에,


“모두들, 잘 해주었다.”

“폐하!”


귀빈석에서 내려온 로세이유 폐하의 등장에 다들 일제히 무릎을 꿇었습니다.


“됐다. 이번 일은 참으로 훌륭했다. 특히 발리에 영애와 크글렛 영애. 그대들의 공로에는 특히나 커다란 포상을 내려야겠구나.”

“포상이라니요!”

“황공한 말씀입니다!”


피피와 로렛타는 폐하의 말에 어쩔 줄 몰라는 모습이었습니다.


“클레어 프랑소와, 레이 테일러, 릴리 릴리움.”

“넵.”

“네.”

“네, 네에!”

“그대들의 보고로는 지금 발리에 가문에게는 인신매매에 가담한 일에 대한 감형 탄원이 있었지?”

“말씀하신대로입니다, 폐하.”

“긍정적으로 검토하도록 하마. 앞으로도 특무관으로서 계속 힘써주길 바란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는 한번 끄덕이고서 근위병들을 이끌고 홀에서 나갔습니다.


“그건 그렇고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요.”

“레이도 그렇게 옴짝달싹 못할 때가 다 있었군요.”

“저 자는 저와 동류니까요.”

“도, 동류요?”

“목적을 위해선 수단을 가리지 않는 타입입니다.”

“아, 아아…….”


레이의 설명에 릴리는 납득한 기색이었지만,


“전혀 달라요.”


저는 딱 잘라 부정했습니다.


“어느 부분에서요?”

“레이는 애초에 목적부터가 사악하거나 하지 않아요. 그러니 전혀 달라요.”

“……저거 봐, 그치? 로렛타?”

“이쪽은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거네.”

“무슨 소리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클레어 님이 바보라는 뜻이에요!”

“네에에?!”


그런 대화를 나누며 한바탕 웃고 떠들었더니 시야 한구석에 문득 눈에 들어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는 하던 대화를 멈추고서 서둘러 그 사람의 뒤를 쫓았습니다.


76. 안녕


“거기 당신, 기다리세요.”

“……!”


콘서트홀의 뒷문을 지나면 바로 나오는 장소.

콘서트홀 관계자들만 이용하는 뒷길은 이미 어둑어둑한 상태였습니다.


제가 불러 세운 사람은 연주회에 참가한 음악가처럼 보이는 연미복 차림의 사람이었습니다.

언뜻 보기에 수상쩍은 구석은 없었지만 왜 살금살금 남들 시선을 피해서 움직였는지, 그것도 뒷문을 통해 빠져나갔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뭔가 용건이 있으십니까?”

“실례.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나요?”

“아쉽지만 지금 좀 서두르는 중입니다. 그럼 이만——.”

“움직이면 공격하겠어요.”

“!”


저는 홀에서 빠져나올 때 잊지 않고 챙겨 나온 지팡이를 남성을 향해 겨눴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디라고 말할 순 없지만 이 남성에게선 뭔가 위화감이 느껴졌습니다.

어쩌면 그 느낌의 정체는 기시감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뭐 하시는 겁니까.”

“손을—— 손을 보여주세요.”

“보시죠?”


남성은 순순히 제 말에 따랐습니다.

저는 살짝 다가가 남성의 손을 살폈습니다.

무대에서 남성이 쥐고 있던 악기는 피피처럼 바이올린이었습니다.

남성의 손에는 바이올린의 현이 새긴 굳은살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 의심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습니다.


“정답은 팔찌야—, 클레어 짱.”

“! 변신 마도구!”

“칫……!”


남성은 분한 듯이 혀를 차고서 몸을 돌려 도망치려고 했습니다.


“주인님, 여기까지입니다.”

“?! 에마, 네 녀석 배신할 생각이냐?!”

“제 진정한 주인은 오직 카트린 아가씨 한분뿐입니다. 주인님을 섬긴 기억은 없습니다.”

“놔라! 놓지 못하겠느냐……!”


도망치려던 남성을 붙잡은 건 에마였습니다.

상대를 옴짝달싹 못하도록 지면에 깔고 누르는 솜씨를 보니, 도저히 평범한 메이드라곤 생각하기 힘들었습니다.


“에마…… 게다가 카트린까지. 주인님…… 이라고 부른 걸 보니 이 사람은……?”

“응. 에마, 팔찌를——.”

“네.”


에마가 남성이 찬 팔찌를 벗겨내자 남성의 모습이 점차 변하면서——.


“클레망 아샤르…… 대체 어떻게……?”

“음악가 중에 아샤르 가문에서 고용한 마법사가 있었거든—. 여차할 땐 서로 모습을 뒤바꿀 수 있어. 음—, 마법 이름이 캐슬링이라고 했던가—?”


트릭을 설명해주는 카트린은 휠체어를 타고 있었습니다.

휠체어 바퀴를 능숙하게 손으로 움직이면서 저를 향해 다가옵니다.


“카트린! 네 녀석, 키워 준 은해도 잊은 거냐!”

“그 점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버님—. 하지만 그만 포기하죠? 더 이상 아샤르 가문의 이름에 먹칠하지 말아주세요—.”

“무슨 소리냐!”


클레망은 바닥에 깔린 채로 몸을 버둥거리며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애썼습니다.


“이 몸이야말로 아샤르 가문 그 자체! 나만 건재하면 아샤르는 끝나지 않는다!”

“이미 끝난 지 오래예요, 아버님. 10년 전 바로 그 날 말이죠—.”

“10년 전……? 카트린, 당신 무슨 말을 하는 건가요……?”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뭔가, 굉장히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그런 예감.


“나는 클레어 짱한테 꼭 사과해야만 해.”

“카트린……?”

“10년 전, 클레어 짱의 어머니, 밀리아 님을 살해한 사람은—— 나야.”

“——?!”


저는 한순간 제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뇨, 귀로는 똑똑히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이 지금 들은 말을 이해하길 거부했습니다.

그치만 그런,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을 수가?!


“대체 무슨 소리예요, 카트린. 어머님은 사고로 돌아가셨다고요.”

“그 사고가 고의적으로 벌어진 일이었던 거야. 나는 아버님의 명을 받아 움직이며 프랑소와 가문에 파견된 암살자였어.”

“대체…… 당신은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요!”


저는 견딜 수 없어서 지팡이를 겨눴습니다.

카트린은 그런 제 행동에도 휠체어에 앉은 채 담담하게 웃었습니다.

——평소와 다름없는 미소로.


“그날, 프랑소와 가문의 마차와 충돌한 평민의 마차에는 나를 포함해 프로 암살자 세 사람이 타고 있었어. 사고로 위장해 프랑소와 가문의 마차를 전복시킨 다음 우리는 도르 님과 밀리아 님을 향해 달려들었지.”


카트린은 마치 혼잣말처럼 계속해서 말을 이었습니다.


“우리의 습격에 맞서 싸운 사람은 밀리아 님이었어.”

“어머님이……?”

“내 짐작으론 도르 님은 전투용 마법을 쓸 줄 모르는 거 아닐까? 어쨌든 우리를 상대로 응전한 사람은 밀리아 님이야. 밀리아 님은 도르 님이 타고 있는 마차에 뭔가 방어용 마법을 걸어 접근을 막은 다음 자신은 맨손으로 우리를 상대했어.”


카트린은 눈을 감았습니다.

마치 그때 그 순간을 떠올리는 것처럼.


“……그래서요……?”

“결과적으로 싸움은 승부를 내지 못했어. 우리 쪽은 나를 제외하면 전멸. 나도 왼쪽 다리에 큰 부상을 입어 움직일 수 없었어. 그리고 밀리아 님은——.”

“……어머님은……?”

“나를 지키다 돌아가셨어.”

“그건 대체…… 어떻게 된 건가요……?”


카트린은 감았던 눈을 뜨고서 설명을 요구하는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얼굴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자학으로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감시하는 자들이 있었어. 우리가 실패했다는 걸 눈치챈 감시자들은 증거인멸을 꾀했어. 나를 포함해 네 명의 동료는 그대로 세상에서 지워질 위기였지. 하지만 밀리아 님이 나를 구해줬어.”

“어머님이…….”

“모든 게 끝났을 때, 나는 내 마법으로 모든 걸 없었던 일로 만들었어. 분명 사고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에겐 그냥 단순한 사고로밖에 보이지 않았겠지.”

“카트린…… 당신은 대체…….”

“그래서 말이지, 클레어 짱. 밀리아 님을 죽인 사람은 나야. 계속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어. 미안해,”


카트린은 휠체어에 앉은 채로 깊이 허리를 숙였습니다.


“이제 와서…… 어쩌라는 건가요……! 그런…… 그런 소릴……!”

“용서해달라고는 하지 않아. 나는 용서받지 못할 짓을 저질렀어. 하지만 속죄는 하게 해줬으면 해.”

“속죄……?”


제가 되묻듯이 말하자 카트린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카트린의 손에는 마법 지팡이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

“안심해. 위해를 가하는 게 아니니까.”


그러면서 카트린은 지팡이를—— 클레망에게 겨눴습니다.


“멈춰라, 카트린! 뭐하는 거냐!”

“알고 계시겠죠, 아버님. 제 마법은——.”

“그, 그만둬!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제국으로 몸을 피해서 재기를——!”

“소거(이레이저).”


카트린의 지팡이에서 강력한 마력이 느껴졌습니다.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그 무언가가 클레망의 몸을 감쌌습니다.


“싫다! 잊고 싶지 않아! 내가 아니게 되어 버리는 건!”

“…….”

“누군가……! 누군가…… 나를…… 구해…….”


마치 힘이 다 빠져나간 것처럼 클레망의 몸이 풀썩 꺾이며 축 늘어졌습니다.


“……죽인 건가요?”

“으음—. 마음을 말이지. 살짝 어루만져 줬어.”

“당신의 마법은 모습을 감추는 마법이 아니었던 건가요?”

“그런 방식으로 쓸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전혀 다른 마법이야.”


카트린은 에마한테 지시를 내려서 클레망을 데려가도록 했습니다.


“내 마법은 기억의 소거야.”

“기억 소거?”

“응. 항상 모습을 감추고 있는 건 시각 기억을 부분적으로 삭제시켰던 거였어.”

“솜씨가 좋네요.”

“에헤헤. 하지만 이 마법의 원래 용도는——.”

“?!”


저는 방심하고 있었습니다.

위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카트린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던 겁니다.

카트린의 마법은 저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카트린……!”

“클레어 짱한테서…… 아니지, 모두의 기억 속에서 나에 관한 기억을 지우도록 할게.”

“무슨……!”

“내가 저지른 죄는 목숨으로도 다 갚을 수 없어. 나는 이제부터 모두의 기억 속에도 남지 않은 채로 살아갈 생각해야.”

“그건…… 존재를 부정하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는다—— 더 이상 그런 삶은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그게 나한테 주어진 벌—— 이 저주받은 인생이 살아갈 길이라고 생각해.”

“다시 생각해보세요!”

“미안해, 클레어 짱.”


손발에서 힘이 빠져나가면서 동시에, 머릿속에서 무언가 소중한 것들이 사라져가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결코 잊지 않겠어요! 당신이 무슨 짓을 하든, 반드시…… 절대로!”

“클레어 짱…….”

“두고 보세요, 카트린! ……아무리 당신이 강한 척 해도…… 저는…… 다 알아…….”


의식이 멀어져갑니다.

저는…… 누구랑,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죠……?


“……역시 싫어…… 싫다고……. 하지만…… 그래도!”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 누군가의 눈물 젖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하지만 그게 누군지는 더 이상 떠올릴 수 없었습니다.


“안녕…… 클레어 짱.”


마지막으로 들려온 목소리는 너무나 슬퍼서, 저는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억누르지 못한 채로 잠에 빠졌습니다.


77. 리코리스의 기억


눈을 뜨자 기숙사의 제 방이었습니다.

확실히…… 저는 클레망을 궁지에 몰아넣고서…….


애매한 기억을 더듬으면서 방 안을 둘러봤습니다.

이상한 구석은 전혀 없었습니다.

아래층에만 이부자리가 깔려 있는 이층 침대, 하나씩만 놓여있는 책상과 옷장.

저는 이 방을 혼자서 쓰고 있습니다.


밖에는 해가 떠 있습니다.

아침이라기 보단 벌써 한낮에 가까운 따사로운 햇빛이 방 안을 비췄습니다.


“클레어 님—!”


대답한 틈조차 없이 문이 벌컥 열렸습니다.

방에 들어온 사람은 레이입니다.


“잠깐, 레이. 아무리 당신이라도 노크 정도는 하세요.”

“아무리, 저라도?! 그 말은 그건가요, 저는 역시 특별한 사람이라는 뜻?”

“큭…… 당신, 요즘 들어 너무 까부는 거 아닌가요.”

“에헤헤, 죄송합니다. 그건 그렇고 몸 상태는 좀 어떠신가요?”


장난스러운 기색을 벗어던지고서 레이는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습니다.


“어떠냐니, 그냥 평범한데요?”

“다행이다—. 한때는 어쩌나 싶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무슨 일이고 자시고도 없어요. 기억 안 나시는 건가요?”


레이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서 살짝 화난 기색이었습니다.


“기억이 두루뭉술해요. 설명을 부탁할게요.”

“클레어 님은 콘서트홀 뒷길에 쓰러져계셨습니다. 갑자기 안 보이신다 싶더니 대체 그런 곳에서 뭘 하고 계셨던 건가요.”

“뭐라니…… 뭐였을까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분명, 누군가를 쫓아서 밖으로 나갔던 것 같습니다.


“클레어 님처럼 총명하신 분도 그럴 때가 있군요, 건망증이라니.”

“그야 그럴 때 정도는 있다고요. 기억력에는 자신이 있는 편이지만 당연히 거기에도 한계는 있는걸요.”

“그렇겠죠—. 참고로 저는 처음으로 뵀던 날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클레어 님이 입었던 옷과 헤어스타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기억력을 정말 쓸데없는 곳에 쓰고 있네요?!”


그런 걸 하나하나 기억해서 대체 뭐가 즐거운 걸까요.


“에이, 원래 잊고 싶지 않은 기억도 있는 법이잖아요.”

“그건 그래요.”

“저에게 있어서는 클레어 님에 관한 기억이 바로 그렇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길게 기억해두고 싶은 정보죠.”

“네네, 그거 참 기특한 일이네요.”


제가 질렸다는 듯이 말하자, 문득 레이가 뭔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짓고서,


“뭘까.”

“무슨 일 있어요?”

“아뇨,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뭔가 중요한 무언가를 까먹은 듯한…….”

“신기한 우연이네요. 저도 그래요.”

“역시 그렇군요! 그렇다면 모닝 키스를 바로——!”

“영원히 기억에서 말소하세요!”


저는 레이한테 베개를 휙 던졌습니다.


“아이 참, 농담이라니까요. 첫 키스는 역시 클레어 님이 먼저 해주셔야죠.”

“그런 기회는 영원히 없을 테니까 안심하세요.”

“클레어 님 쌀쌀맞아—. 그 점이 좋아—!”

“피, 피곤해요…….”


제가 넌더리를 내고 있었더니,


“뭐, 그래도 쓰러져계셨던 건 정말이니까 오늘은 부디 안정을 취해주세요. 내일도 특무관 일은 하루 쉬도록 하죠.”

“그럴 수는 없다고요. 아직 사라스 님과 아버님이 남아 있잖아요?”

“클레망을 붙잡은 것도 크나큰 공적입니다. 폐하도 하루쯤은 눈 감아 주신다니까요.”

“하지만…….”

“아시겠습니까, 클레어 님?”


레이는 진지한 표정을 짓고서 손가락을 척, 세웠습니다.


“몸이 튼튼해야 일도 잘 풀리는 법.”

“네, 네에…….”

“컨디션이 안 좋은 상태로 일을 해봤자 기뻐할 사람이라곤 꼴도 보기 싫은 상사뿐이니까요.”

“그거 설마 로드 님을 두고 하는 말이에요?”


만약 그렇다면 불경한 데도 정도가 있습니다.


“아, 아뇨, 예시입니다.”

“그런 것 치고는 이상하게 실감이 느껴지는 말이었는데요?”

“하하— 블랙기업 노동환경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어서요.”

“그, 그래요…….”


블랙 노동환경 어쩌고가 무슨 소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충 어감을 통해 이해했습니다.


“아무튼 오늘은 느긋하게 쉬어주세요. 지금 아침 식사를…… 아, 벌써 점심인가. 어쨌든 식사를 가져오겠습니다.”

“고마워요.”

“클레어 님, 식욕은 있으세요?”

“네. 평범하게요.”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고마워요. 부탁할게요, 레이.”


제가 감사 인사를 건네자 레이는 식사 준비를 하러 방을 나갔습니다.


“하지만 지금 막 일어난 참인데 다시 눕기도 좀 그렇죠…….”


레이가 보면 뭐라고 할 것 같았지만 책이라도 읽을까 싶어서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다가갔습니다.


“? 이건……?”


제 책상 위에 낯선 캔디 상자가 있었습니다.

레이가 사온 걸까 싶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사탕은 한 개밖에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이건…… 리코리스?”


독특한 향기가 코를 간지럽혔습니다.

도저히 좋아하는 향기라곤 말할 수 없었지만 저는 어째선지 자연스럽게 사탕을 입에 넣었습니다.


“……어?”


갑자기 눈물이 흘러나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번 넘쳐흐른 눈물은 아무리 닦고 또 닦아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근거는 없습니다.

흔적도 없습니다.

기억조차도.

그런데도 어째서일까, 제 곁에 소중한 사람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어떻게 된 걸까…… 나…….”


그대로 멍하니 서서 사탕을 입에 굴리고 있자니, 다 녹았을 때쯤에는 감정의 파도도 차차 가라앉았습니다.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클레어 님—— 어라, 서 계시면 안 되잖아요. 주무셔야죠.”

“지금 막 일어난 참이라 잠이 오지 않는다고요—— 와앗?!”


레이는 제 얼굴을 보자마자 식사가 담긴 쟁반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선 몸을 제 쪽으로 불쑥 내밀었습니다.


“클레어 님, 무슨 일 있으셨어요?”

“무, 무슨 일이라뇨? 좀, 레이! 가까워요! 가깝다니까요!”

“눈이 새빨갛습니다. 우셨어요?”

“방금 일어나서 그래요.”

“방금 전엔 괜찮았습니다. 말했잖아요? 클레어 님 정보는 잊지 않는다고.”

“알 게 뭐예요!”


그치만 저 스스로도 영문을 알 수 없었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눈물을 흘렸는가.

왜 그렇게도 슬픈 마음이 복받쳤는가.


“아무튼! 저는 괜찮으니까 식사를 하죠. 오늘 메뉴는 뭔가요?”

“나중에 또 물어볼 거예요. 오늘은——.”


그 뒤로는 평소 같은 레이와 저로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저는 소중한 사람의 기억을 잃었습니다.

잃어버렸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 채로.


78. 모든 사람이 당신을 잊는다고 해도


※카트린 아샤르 시점의 이야기입니다.


클레어 짱을 포함해 나를 아는 사람들의 기억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전부 지웠다.

앞으로도 지금까지 만난 적 있는 사람이라면 빠짐없이 나에 관한 기억을 지워나갈 생각이다.


——그게 내가 스스로에게 부과한 벌이니까.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클레어 짱을 보았다.

평소의 날카로운 인상에 비해 잠든 그녀의 얼굴은 너무나 앳되어 보였다.

나는 계속 그런 클레어 짱을 죽이려고 했다.


이건 클레어 짱한테 하지 못한 얘기지만 내가 클레어 짱과 소꿉친구가 된 건 우연도, 운명도 아니다.

아버님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님의 밀명을 받아 클레어 짱을 암살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계속해서 노리는 척만 해왔다.


나에게는 클레어 짱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먼지만큼도 없었다.

내 삶 자체가 클레어 짱의 어머니인 밀리아 님이 구해주신 목숨.

그런 생명의 은인의 딸을 어떻게 죽일 수 있겠는가.

내가 클레어 짱을 암살하라는 밀명을 수락한 건 내가 임무를 받고 있는 동안엔 다른 암살자가 찾아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런 나날도 오늘로 끝이다.


쓰러져 있는 클레어 짱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꼭 안아주고 나서 몸을 일으켰다.

너무 오랫동안 여기 있을 수는 없다.

떠날 채비는 다 마쳤으니까 빨리 바우어를 떠야지.


나는 휠체어를 타고 있는 상태라 그리 빠르게 움직이는 건 불가능하다.

자신의 다리에 답답함을 느끼면서 왕도 서쪽 문을 향해 이동했다.


“…….”


왕도의 밤은 떠들썩하다.

달이 하늘 높이 떠오른 시각인데도 대로에 면한 식당과 주점에서 활기찬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서 동료들과 고된 하루를 끝낸 기쁨을 나누고 있겠지.

하지만 이제부터 나에겐 그런 상대가 생길 일은 없다.


——고독.


지금까지는 클레어 짱이 곁에 있는 게 당연한 생활이었다.

그런 내가 얼마만큼 혼자서 살아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해야지.

나에게 자살 같은 어정쩡한 도피는 용납되지 않는다.


“클레어 짱, 무사히 기숙사에 돌아갈 수 있으려나—.”


걱정할 건 없을 터다.

무엇보다 그녀에겐 레이 짱이라는 훌륭한 파트너가 있다.

클레어 짱은 아직 마음을 활짝 열지 못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도 시간문제다.

두 사람은 늦든 빠르든 서로 이어지겠지.


클레어 짱에겐 아군이 잔뜩 있다.

예를 들어 피피 짱, 로렛타 짱, 얼마 전까지는 레네 짱도 있었다.

나한테 가장 인상 깊었던 사람은 마나리아 님이다.

클레어 짱의 친언니나 마찬가지인 마나리아 님은 나와 처음 만났을 때, 내 마법을 단숨에 무효화시키고선 이렇게 말했다.


——너는 클레어의 적? 아니면 아군?


마나리아 님은 내 마법의 정체를 꿰뚫어 본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 마법이 암살에 아주 적합하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던 거겠지.

대답 여하에 따라서는 그 자리에서 살해당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솔직하게 전부 털어놨다.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나를 의지하도록 해. 어느 정도는 힘이 되어줄 수 있을 테니까.


마나리아 님은 나를 여동생의 친구로 인정해줬다.

진심으로 여동생을 염려하는 언니의 모습이었다.


“좋겠다—…….”


저도 모르게 부러움이 섞인 목소리가 나왔다.

이러면 안 되지.

나에게는 클레어 짱 곁에 있는 레이 짱이나 마나리아 님 같은 존재를 원할 자격이 없다.

이미 결심한 일 아닌가.

앞으로 평생 혼자 있겠다고.


“적어도 클레어 짱만큼은 반드시 행복해지기를—.”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서문에 도착했다.


“응? 뭐냐 너는?”


문지기가 내가 다가온 걸 눈치챘다.


“안녕하세요—.”

“아아. 혹시 밖에 나갈 건가?”

“네—.”

“오늘은 이미 문을 닫았어. 내일 다시 와.”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에 대해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아버님이 벌인 일 때문에 왕도는 조금 소란스러운 상황일 것이다.

그러면 당장 내일부터는 검문이 강화될지도 모른다.


“안 돼, 안 돼. 오늘 밤은 포기하도록.”

“어쩔 수 없나—.”


나는 얼마 남지 않은 마력을 끌어올려서 나에 대한 기억을 문지기에게서 빼앗았다.

정신을 잃은 문지기가 바닥에 쓰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부축했다.


“미안해—. 지나가도록 할게—.”


문지기를 지면에 살포시 눕혀 놓고서 휠체어를 밀어 문을 지나갔다.


“어디로 가실 생각이신가요, 아가씨. 저를 빼놓고서.”

“……어?”


서문을 빠져나온 직후, 갑자기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있을 리가 없는 사람이 보였다.


“에마……?”

“잠깐 눈을 뗀 사이에 모습을 감추셔서 여기저기 찾아다녔다고요.”

“아니…… 그게…….”

“어딘가에 가실 거라면 먼저 저한테 말씀부터 해주십시오.”

“……어떻게……?”


나는 에마에게도 잊지 않고 망각마법을 걸어뒀었다.

그런데 에마는 나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라고 하심은?”

“하지만 내 마법은 상대의 기억을 소거하는 마법이야. 어떻게 에마는…….”

“아아, 그런 거였습니까.”


에마는 한없이 차분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저는 마법이 잘 듣지 않는 체질입니다.”

“마법이…… 잘 듣지 않아?”

“네. 원인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 딸은 아예 마법이 통하지 않는 체질이었습니다. 유전이겠죠.”


예전에 에마한테 들었던 얘기로는 그녀는 한때 어떤 나라의 왕족이었다고 한다.

몰락한 나라를 버리고 떠났다고 들었다.

나라를 버리기 직전에 그녀가 낳은 딸은 마법이 전혀 듣지 않는 체질이었다나.


“그러니 아가씨는 제 기억을 지우실 수 없습니다. 포기하고 저를 곁에 있게 해주십시오.”

“그런…… 안 된다고……. 나는 고독하게 살아가겠다고 스스로에게 맹세했어. 그건 에마도 예외가 될 수 없어.”

“그런 건 잘 모르겠습니다. 제 주인은 평생가도 카트린 아가씨 오직 한분뿐. 아가씨가 어떤 생각을 품고 계신다고 해도 저는 이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에마는 내 설득을 완고하게 뿌리쳤다.

에마는 고집 있는 여자다.

이렇게 되면 설득하긴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든 납득시켜야 한다.


“나는 더 이상 아샤르 가문 사람이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에마를 고용할 돈도 없어.”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에마가 나를 섬길 필요는 이제 없어.”

“저는 아직 은혜를 갚아야 합니다.”

“에마…….”


에마는 어디까지고 따라올 생각인가 보다.


“아가씨는 제 목숨을 구해주셨습니다. 세상분간도 못하고 헤매던 저에게 다시 한번 살아갈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에마의 눈동자는 한없이 진지한 빛을 띠고 있었다.


“아가씨가 앞으로 걸어가려는 속죄의 길을 함께하는 것이야말로 제가 은혜를 갚을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에마는 그렇게 말하며 내 앞에서 신하의 예를 올렸다.

나는 커다랗게 한숨을 쉬고서,


“나는 몰라. 좋을 대로 해.”

“네. 좋을 대로 하겠습니다.”

“……이 고집불통.”

“아가씨야말로요.”


나는 휠체어를 휙 돌려서 자리를 떠나려고 했지만 문득 휠체어를 미는 손이 가벼워졌다.


“내가 직접 할 테니까.”

“저는 제가 좋을 대로 하고 있을 뿐인지라.”

“이러다 손아귀 힘이 약해지겠어.”

“오늘은 평소보다도 훨씬 많이 움직이셨죠. 그만큼 오늘 운동은 이미 충분하실 터.”


에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계속 섬길 생각인 걸로 보였다.

그 사실에 커다란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앞으로의 긴 여행이 고독하지 않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기뻤다.


“……에마.”

“네, 아가씨.”

“……고마워.”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언제까지 살아갈 수 있을지, 그건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내 속죄의 여행은 분명 기나긴 여행이 되겠지.

그럼에도 나는 살아간다.


서투르면서도, 마음씨 상냥한 메이드와 함께.


79. 금기의 불


가슴 속에 무언가 커다란 게 빠져나간 상실감은 가시지 않고, 하지만 그 상실감의 정체는 알 수 없는 채로 부정을 저지르는 귀족들을 색출하는 일을 이어갔습니다.

그 과정에서 레지스탕스 조직과 접촉하고, 레이한테 주도권을 일임하고서 레지스탕스 두목과 회담도 벌였습니다.

저에게는 이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어떤 의의가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레이에겐 뭔가 수확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사라스에게 부정 못 할 증거를 들이밀고, 레레어의 활약 덕분에 지금 이렇게 눈앞에 있는 사라스에게 체크메이트를 선언하려고 했던 순간——.


“릴리…… 불쌍한 아이……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키리에 엘레이손).”


그 말은 뭔가 주문이었던 걸까요.

사라스가 그 말을 입에 올리자 바로 곁에 있던 릴리 추기경이 풀썩 쓰러졌습니다.


“릴리 추기경?!”


저는 황급히 릴리 추기경을 향해 다가가려고 했는데,


“클레어 님, 거기서 떨어져!”


레이가 제 옷자락을 붙잡고 확 끌어당겼습니다.

몸이 뒤로 젖혀진 순간 은빛 섬광이 제 머리카락을 스치면서 몇 가닥을 허공에 흩뿌렸습니다.


“정말이지…… 싫증나는구만—.”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태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너는…….”

“여어, 레이 씨에 클레어 님, 반나절만이네요.”


마치 딴 사람처럼 변해버린 저 말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우리 앞을 몇 번이고 막아섰던 가면의 남자입니다.


“사라스! 릴리 추기경한테 무슨 짓을 한 건가요!”


돌변한 릴리 추기경을 경계하면서 사라스한테 날카롭게 물었습니다.


“거기 있는 평민은 2속성보유자(듀얼 캐스터)였죠.”

“제 질문에 대답하세요!”

“대답하고 있고말고요. 학창시절 제 전문은 암시라서 말이죠. 테마는 ‘듀얼 캐스터의 인공적 실현’이었지요.”


사라스는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근위병, 사라스와 릴리를 붙잡아라.”


로세이유 폐하의 말에 근위병이 사라스와 릴리 추기경을 포위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조무래기들로 나를 막을 수 있겠냐고.”


릴리 추기경이 어디서 꺼낸 건지 단검을 꺼내서 섬광처럼 휘두르자 근위병들은 단숨에 수세에 몰렸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근위병들의 실력이 정말 형편없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근위병에 배속된 사람들은 왕국에서 엄선한 정예병입니다.

일대일이라면 모를까, 이만한 인원수를 상대로는 설령 레이라도 쉽지 않겠죠.

다시 말해 근위병들이 약한 게 아닙니다.

릴리 추기경이 상식을 뛰어넘을 정도로 강하다고 해야겠죠.


“릴리 추기경, 그만두세요!”

“소용없습니다. 저건 릴리지만 릴리가 아니야.”


사라스가 큭큭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습니다.


“듀얼 캐스터를 인공적으로 만들어내는 실험…… 그건 절반만 성공했습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죠?”


레이가 묻자 사라스는 머리 나쁜 학생한테 설명하는 말투로 말을 이었습니다.


“저는 암시를 통해서 사람 안에 또 하나의 인격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태어난 새로운 인격은 별개의 마법 적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걸 알아낸 겁니다.”


릴리 추기경이 원래 가지고 있는 마법 적성은 분명 수속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라스는 암시를 걸어 새로운 인격을 창조했고, 다른 속성도 지니게 만들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런 일이 정말로 가능한 걸까요.

당장은 믿기 힘든 말이었습니다.


“저 가면 남자의 정체가 릴리 님이었다는 뜻?”

“그 말대로. 저한테 부정을 추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수사 정보를 저한테 누설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마지막의 마지막 덜미를 잡히고 말았지만요, 사라스는 우리를 조롱하듯이 말했습니다.

쉽게 말해 사라스의 방에서 처음으로 장부를 조사했을 때 아무런 결점도 찾을 수 없는 완벽한 장부였던 이유는 릴리 추기경을 통해서 사라스한테 정보가 새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거겠죠.


“하지만 모습이 완전히 다르다고요! 그건 변장만으로는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분명 마도구입니다. 유 님 때 있었던 일을 생각해보세요. 그 팔찌는 릴리 님한테서 빌린 물건이었잖아요.”


레이의 지적을 듣고서야 퍼뜩 깨달았습니다.

확실히 레이가 유 님과 모습을 바꿨을 때 썼던 마도구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편리한 물건이 다 있구나 싶은 생각만 하고 넘어갔지만 아마도 원래는 릴리 추기경이 정체를 감추기 위해 사용하던 물건이었겠죠.


“자신이 이런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릴리 님 자신은 알고 있습니까?”


레이가 물었습니다.

이미 반쯤 대답을 예상하고 있는 것처럼 딱딱하게 굳은 어조였습니다.


“모르고 있습니다. 알고 있었다면 그 아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테니까요.”


이 무슨 비열한.

저 티 없이 순진한 릴리 추기경을 자신의 야심을 이루기 위해 장기말로 삼다니.


“자아, 릴리. 이 녀석들을 전부 해치우도록 하세요.”

“아주 쉽게도 말하네. 여기에는 레이랑 클레어가 있단 말이지?”

“너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겠죠.”

“못하는 건 아니지만 네놈의 안전은 보장 못하는데?”

“흐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한 명, 또 한 명씩 근위병들이 쓰러지고 있습니다.

휘두르는 칼날에 주저 따위 없었고, 사람을 해치는데 망설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이대로라면…… 안 되겠어요.


“그렇다면 릴리. 여기선 일단 탈출하는 걸 우선하도록 하지요.”

“놓치지 않겠어요!”


저는 이미 매직레이의 발사 태세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사라스라면 몰라도 릴리 추기경의 목숨을 빼앗는 건 바라는 바가 아니지만 지금은 긴박한 상황입니다.


“사라스, 릴리 추기경. 이 마법은 손대중이 불가능해요. 목숨이 아깝다면 투항하세요.”


저는 두 사람을 시야에 넣을 수 있는 위치로 이동하면서 경고를 날렸습니다.


“저렇게 말하고 있습니다만?”

“너도 조금은 일하란 말이…… 지!”


릴리 추기경은 자신을 포위하고 있는 근위병의 마지막 한 사람까지 쓰러트리고선 이번엔 사라스를 둘러싼 근위병들을 베어 넘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만두세요, 릴리 추기경! 또 다시 전투 행동에 나서면 쏘겠어요!”

“해보시지.”

“!”


제 최후통첩에도 불구하고 릴리 추기경은 나이프를 휘두르는 손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피해자를 늘릴 수는 없어요.


“……큭, 미리 사과하겠어요!”


저는 각오를 다지고서 릴리 추기경에게 매직 레이를 발사했습니다.

네 줄기의 광선이 작은 체구를 삼키며 쇄도했——.


“뭐라고요?!”


매직 레이의 빛은 그녀를 불태우지 못하고, 환각이었던 것처럼 코앞에서 산산이 흩어졌습니다.


“이 릴리는 제 최고 걸작이거든요. 마니라아 왕녀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이기지는 못할지언정 결코 뒤지지 않는 마법을 쓸 수 있답니다.”


사라스가 유열로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스펠 브레이커는 아닌 겁니까?”

“그 정도로 상식을 벗어난 마법은 아닙니다. 이 릴리의 적성은 풍속성 높음 적성. 특기로 삼는 마법은 시간 조작입니다.”


시간 조작…… 이라고요?

그렇다면 그녀는 제 매직 레이의 시간을 되감아서 마법으로 구성되기 전의 마력으로 변환시켰다—— 그런 원리인 걸까요.

무슨 터무니없는 마법인가요.


“최고 걸작이라고 말씀하셨죠? 즉, 릴리 님만 있는 게 아닌 거군요?”

“당연합니다. 자기 자식을 초기 실험용으로 쓰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릴리에게 시술을 한 건 연구가 완성된 후라고요. 무엇보다——.”


거기서 사라스는 한번 말을 끊고서,


“연구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꽤나 시간이 걸렸습니다. 폐인이 되어버린 고아는 열이나 스물 정도로는 셀 수도 없겠죠.”


산뜻한 표정으로 역겨운 소리를 태연히도 지껄였습니다.


“이 인간도 아닌!”


저는 사라스 쪽으로 조준을 바꾸고서 다시 한번 매직 레이를 발사했습니다.


“엇차.”


그러나 근위병들을 전부 쓰러트린 릴리 추기경이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끼어들어 마법을 무효화시켰습니다.

그렇다면——!


“레이, 사라스를 노리세요! 최대한 많은 숫자로!”

“네!”


레이는 순식간에 제 노림수를 파악했는지 얼음 화살을 스무 개쯤 생성해서 사라스를 둘러싸듯 쏘아냈습니다.


“칫…… 역시나 싸움에 능숙하구만.”


레이의 얼음 화살을 무효화시키려면 릴리 추기경은 사라스 옆에서 움직일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발 묶기입니다.

레이와 저는 사라스와 릴리 추기경에게 연거푸 마법을 쏘았고, 릴리 추기경은 사라스를 보호하기 위해 날아오는 마법을 무효화했습니다.

상황은 교착상태——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포기하세요, 릴리 추기경.”

“어째서?”

“이대로라면 당신 쪽이 먼저 마력이 고갈될 거예요.”


저쪽은 릴리 추기경 혼자인데 반해, 이쪽은 둘입니다.

거기다 우리가 사용하는 마법은 기초적인 마법 화살에 불과합니다.

릴리 추기경이 쓰는 시간 조작이 얼마나 마력을 소모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법 화살 보다야 많은 마력을 소모할 거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릴리 님, 이제 그만해주세요.”

“나로서도 그다지 좋아서 하는 건 아니긴 한데 말이지.”

“그러면!”

“하지만 말이야.”


거기서 릴리 추기경은 한 박자 말을 끊고서,


“이런 녀석이라도 내 아버지인 거야.”


자조하듯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품속에서 포션 병을 꺼내 들고서 단숨에 들이켰습니다.


“설마 칸타렐라?!”


레이의 비명 섞인 외침에 유클레드에서 루이와 싸웠을 때를 떠올렸습니다.

평범한 모험가였던 루이조차도 그렇게나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만약 릴리 추기경이 마법이 통하지 않는 언데드 상태로 변하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위협으로 변하겠죠.


“틀—려. 이건 초월급 마력회복 포션이다.”


딱 잘라 단언하는 말에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그런 귀한 물건을 잔뜩 들고 있을 리는 없겠죠.”

“그렇겠지만 내 경우에는 어떻게든 된단 말이지. 그게.”


릴리 추기경은 포션 병에 시선을 옮기고선 거기에 집중하는 것처럼 강하게 노려봤습니다.


“?! 완전 사기잖아요?!”


레이의 비명은 지극히 당연했습니다.

비어있던 포션 병이 눈으로 보기에도 확연한 속도로 차오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것도 시간을 되돌려서 발현시킨 현상이겠죠.


“뭐, 이런 식의 사용법도 가능하다는 거다.”

“큭…….”


저는 어금니를 악물었습니다.

초월급 마력 회복 포션은 마력을 거의 완전히 회복시켜줍니다.

그런 걸 무제한적으로 사용한다면 먼저 마력이 고갈에 빠지는 건 우리 쪽입니다.


“쯧, 하지만 이대로라면 장기전은 각오해야겠는데.”

“…….”


뭔가 계책이 없을까, 하고 머리를 굴리면서 릴리 추기경을 경계했습니다.


그때——.


지면이 격렬하게 흔들렸습니다.


◆◇◆◇◆


갑작스런 땅울림에 동요하고 있었더니 갑자기 누군가가 몸을 밀쳐 저를 엎드리게 했습니다.

그 직후, 쨍그랑하는 소리가 나며 알현실 창문 유리가 깨졌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아무래도 저를 밀친 사람은 레이인지, 저를 보호하듯이 몸으로 덮은 상태입니다.

그대로 잠시 얌전히 엎드려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제 괜찮을 거예요.”


레이는 그러면서 몸을 일으켜 제 손을 잡아 일으켜줬습니다.

대체 뭐가 뭔지 상황을 알 수 없었던 저는 알현실 상황을 눈에 담자마자 멍해졌습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알현실은 척 봐도 처참한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집기들은 부서졌고, 붉은 카펫 위에는 크고 작은 돌덩이들이 굴러다니고 있었습니다.


“폐하!”


근위병 중 한 명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고개를 돌리자 옥좌를 향해 달려가 누군가를 서둘러 구하려고 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저는 핏기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습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은 로세이유 폐하였습니다.

게다가 머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습니다.


“레이, 치료를!”


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레이는 빠르게 폐하 곁으로 달려가 치료 마법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틀렸습니다.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요…….”


바우어는 현왕 로세이유 폐하를 잃고 말았습니다.

그건 다시 말해 나라가 위기에 빠졌다는 소리입니다.


“그렇죠, 사라스와 릴리 추기경은요?!”


알현실 안을 둘러봤지만 이미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혼란을 틈타 도망간 모양입니다.


저는 동요를 눌러 죽이면서 상황을 파악하는데 진력했습니다.

아마 이건 역사서에도 기술되어 있었던 삿살 화산의 분화겠죠.

아직은 추측이지만 이게 정답일 거라고 느꼈습니다.

역사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삿살 화산의 분화는 분화 자체보다도 그 이후에 미칠 영향이 더 막대할 겁니다.

바우어는 앞으로 고난의 시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은——.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키고 있었을 때, 문득 레이가 무릎을 꿇고서 망연자실한 상태에 빠져 있는 걸 깨달았습니다.

무리도 아닙니다.

하지만 레이는 제 힘이 되어줘야 해요.


“레이…… 레이! 정신 차리세요!”


제가 큰 소리로 부르자 레이의 눈이 천천히 저를 눈동자에 담았습니다.

하지만 아직 정신이 멍한 상태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라스와 릴리 추기경은 일단 잊어버리세요. 지금 당장 해야만 하는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요.”

“……클레어 님.”

“이제부터 왕국은 위기에 직면하게 되겠죠. 과거의 역사를 통해 봤을 때, 삿살 화산의 분화 후에는 대기근이 일어났다고 들었어요.”


화산재와 화산탄 때문에 농작물에 막대한 피해가 생길 겁니다.

서둘러 뭔가 손을 쓰지 않으면 국내에 수많은 아사자가 나오겠죠.

우리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대책을 강구해야만 합니다.


“왕국은 어떻게든 이 위기를 넘어서야 해요. 그것도 로세이유 폐하 없이.”


그래요.

현왕이었던 로세이유 폐하는 이제 없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왕을 선출해야만합니다.

게다가 한시라도 빨리.


“근위병, 귀족원 의장에게 연락을. 긴급회의를 소집합니다. 그런 다음 로드 님과 세인 님의 안부를 당장 서둘러 확인하도록 하세요.”


아직도 넋이 나가있는 레이는 내버려두고서 저는 움직일 수 있는 근위병들에게 지시를 내렸습니다.

사태는 일각을 다툽니다.

근위병들도 동요하는 모양이었지만 역시나 엄격한 훈련을 받은 정예병다웠습니다.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명확해지자 바로 행동에 나섰습니다.


레이는 여전히 멍한 상태입니다.

이런 짓은 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저는 레이의 뺨을 손바닥으로 강하게 때렸습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저를 옆에서 지탱해 주겠다는 그 말은 거짓말이었던 건가요?!”


그건 반쯤 애원에 가까운 말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부터 제 앞을 기다리고 있는 갖은 고난들에 맞서기 위해서는 그녀의 존재가 필수불가결합니다.

저는 어떻게든 레이를 다시 일으켜 세울 필요가 있습니다.

레이는 뺨을 문지르면서 살짝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지만 점차 눈에 빛이 돌아옵니다.


“정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제 괜찮습니다.”

“아주 좋아요.”


그 말과 함께 저는 잠시 동안 레이를 꼭 끌어안았습니다.

마치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처럼.


“극복하겠어요, 이 위기를.”

“네!”


우리는 바로 신속하게 행동을 개시했습니다.

초기 대처치고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지만 이윽고 한 가지 비보가 도착했습니다.


그건 로드 님이 행방불명이라는 소식이었습니다.


――――

이상으로 제7장은 종료됩니다.

제8장 공개까지, 또 잠시 시간이 걸립니다.

오래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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