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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를 데려오고 벌써 3년이 되어서 조조는 작년 10월 10일을 기점으로 3살이 되었다. 

조조를 데려오기까지 수년간의 고민의 시간이 있었다. 자취기간도 길고 이후에도 혼자 일을 하면서 서로 의지할 수 있는 동물을 너무 키우고 싶었다. 하지만 어렸을 적 집에서 키웠던 강아지 아지를 더 잘 키워주지 못했다는 죄책감때문에 쉽게 강아지를 데려오지 못했다. 

중고전자 가게를 하던 우리 가게에 손님들이 데려왔던 6개월 된 잡종 강아지. 그 강아지를 나와 내 동생이 너무 예뻐하자 손님들은 며칠 후 다시 가게를 방문해 본인들이 더 이상 키울 수 없는 상황인데 혹시 우리가 강아지를 키우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너무 좋아했던 기억이 나서 이 집에 먼저 물어보는 거라고. 나와 동생은 뛸듯이 기뻤고 우리가 너무 좋아하니 부모님도 허락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아지는 참 행복한 강아지였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빠와 함께 스쿠터를 타고 달리기도 했고 주말마다 가족들끼리 산,들,바다로 함께 놀러갔다. 그런데 우리 집은 가난했다. 아지가 아플 때 마다  병원에 데려 갈 돈이 없었다. "개들은 가만 두면 다 나아~" 라고 아빠는 말했다. 언젠가 한 번 내가 우겨서 동물 병원에 갔었는데 병원비로 8만원이 나왔던 적이 있다. 충격. 그 때 8만원은 지금의 8만원이 아니었고 사람이 아파도 8만원 내기가 쉽지 않은데 동물이 아플 때 8만원을 낸다니 너무나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아빠는 안경테를 바꿀 몇만원의 여유가 없어서 다 찌그러진 안경을 끼고 지내고 있었다. 동물병원은 이제 오지 말아야겠구나 생각했다.

그 때부터 막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우린 아지의 최고의 보호자는 아니구나. 양치 개념도 없었던 우리는 아지를 키우면서 한번도 양치를 시켜준 적이 없었다. 조조를 키우기 전에 난 강아지가 양치를 해야하는 지 몰랐으니. 즉 우리는 무지해서 그리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서, 아지를 좀 더 잘 관리하거나 제 때 치료해주지 못했다.

아지가 5살 되던 무렵 동생은 서울로 고등학교를 갔고 7살 되던 무렵 나는 서울로 대학을 가게 됐다.  나와 동생 모두 서울로 가면서 아지는 완전히 부모님의 담당이 되었다. 그런데다 엄마 아빠의 불화까지 생기면서 이제 그 누구도 아지에게 줄 마음의 여유가 남아있지 않았다. 말년의 아지 모습은 참 안좋았다. 눈은 탁하고 이는 다 빠지고 항문은 빨갛고 튀어나와 있었다. 저 상태라면 배변을 할 때마다 엄청나게 고통스러울 것이다. 너무 안타까워서 "아지 좀 병원 데려가봐야 하는거 아냐?!" 하고 아빠를 질책했다. 하지만 내가 직접 병원에 데려가진 않았다. 일년에 한두번 진주에 내려와서 입으로만 잔소리하는 나. 내 대학교 학비와 생활비를 대느라 더 돈이 없는 아빠. 원래 늙으면 다 그렇게 된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는 아빠의 말을 믿고 싶었던 나. "그래, 아지는 늙어서 그런거고. 이제와 병원에 가도 달라질 건 없을거야. 병원비만 많이 나오겠지."

아지는 11살 되던 해에 시골로 보내졌다. "시골...? 어디? 누구?" 내가 아빠에게 물었다. 이제 아지가 많이 늙어서 시골에서 좋은 공기 마시며 살다가 죽는게 제일 나을거라며, 지인에게 보냈다고 하는 아빠.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알 수 있었다. 그 늙고 병든 개를 누가 데려다 키워주겠는가. 아지는 개장수에게 보내진 것 같았다. 이제 앞도 보지 못하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아지. 왜 아빠는 아지를 끝까지 데리고 있지 않지? 왜? 왜 다른 사람에게 보낸거지? 적어도 눈 감는 순간까지만 아빠가 데리고 있어줄 수 있는 거 아냐? 왜? 왜? 화내고 싶었지만 내겐 그럴 자격이 없으니 화내지 못했다. 내가 데려다 키울 거 아니잖아. 서울로 온 이후로 난 아지 얼굴을 자주 보기는 커녕 아지의 똥, 오줌도 치워준 적 없었으니까. 말년의 아지는 날 알아보지도 못했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내 코가 석자여서, 우리 가족의 복잡한 일을 신경쓰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아서, 아지의 힘든 모습들을 이런 저런 변명들로 모른 척 했으면서 이제와서 내가 무슨 자격으로.

아지를 시골로 보냈다고 하는 아빠의 말을 들은 이후 꿈에 아지가 나오기 시작했다. 꿈 속 아지의 모습이 너무 처참했다. 꿈에서 너무 괴로워서 엉엉 울었다. 울다가 잠에서 깼다. 너무 미안해서, 하지만 마음 뿐이고 실제로 행동하지 않은 내 자신이 너무 역겨워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는 내가 너무 싫어서 엉엉 울었다. 아지를 너무 많이 사랑했고 추억이 너무 너무 많았는데. 내 핸드폰 바탕화면은 항상 아지였는데. 아지와 이불 뒤집어쓰기 놀이를 하면서 너무 즐거웠는데. 그 아지의 참혹한 몰골이 꿈에 나와서 나를 원망하는 것만 같았다. 내 인생에 다른 동물이 있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난 그럴 자격이 없어 .

그렇게 수년간 꿈에 나오던 아지가 언젠가부터 나오지 않기 시작했다. 참 신기하게도 어느 순간부터 아지는 다시는 내 꿈에 나오지 않았다. 

개인방송을 하면서 혼자인 시간이 너무 많아지면서 우울증 문턱까지 갔을 때, 오래 고민하던 그 고민을 다시 하게 되었다. 이제 부모님이 아닌 내가 보호자가 되어서 강아지를 키워도 되는걸까? 데려와도 될까? 아니야... 안돼. 책임질 수 있어? 내 삶을 강아지에게 맞출 자신 있어? 강아지가 아프면 병원비가 얼마가 들든 곧바로 치료해줄 수 있어? 아지에게 해주지 못했던 보호자로서의 역할, 너 정말 할 수 있어? 그렇게 수없이 고민하던 새해의 어느 날. 극도의 우울한 감정으로 도저히 서울에 혼자 있을 수가 없어서 고향인 진주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할 수 있어. 그 다음 날 바로 진주의 한 애견샵에서 조조를 데려오게 됐다. 

그렇다. 난 조조를 펫샵에서 데려왔다. 조조를 데려오기 전에는 강아지 고양이를 어디서 어떻게 데려와야 하는건지 몰랐고 아지도 손님이 우리더러 키우라고 보내줬던 터라 강아지는 당연히 애견샵에서 데려오는 것인 줄 알았다. 문제의식도 전혀 없었기 때문에 조조를 데려온 그 날 바로 아프리카 생방송을 켜서 "저 드디어 강아지 데려왔어요" 하며 샵 얘기도 다 했더랬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그 장면을 막 흥분해서 떠들었었다. 조조가 몇번째 칸 유리상자 안에 등을 돌리고 누워 있었는지. 말을 걸자 그제야 내 쪽을 바라보던 조그만 크림색 아기 강아지가 왜 측은해 보였는지. 힘도 없고 기운도 없어서 혹시 어디 아픈건가 싶었던 아이. 좀 더 활발하게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들보다 그냥 이유없이 끌리듯 조조를 선택하고 처음 조조를 안았던 그 순간. 내가 너를 행복하게 해줄게. 평생 너를 지켜줄게 다짐했다고. 

조조를 키우면서 강아지 프로그램에도 관심을 정보도 찾아보면서 그제서야 '강아지 공장' 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충격적이었다. 애견샵에 있는 강아지들이 물건처럼 공장에서 태어나는 것이었다니. 조조도 강아지 공장에서 온 강아지였을 것이다. 조조의 엄마는 강아지 공장에서 조조를 낳았겠지. 조조 꼬리가 짧은 것도 단미(꼬리를 자르는 것)를 해서 그렇다는 걸 알게 됐다. 가여워라... 세상에... 애견샵 분양의 진실을 알게 된 후부터 나와 조조의 아름다운 운명적 만남은 절대 입밖에 낼 수 없는 것이 됐다. 우리 둘에게는 운명적인 만남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그저 애견샵을 이용한 한 명의 고객이니까. 그런 고객들 때문에 강아지 공장은 계속 돌아가는거고.

조조를 펫샵에서 데려왔다는 사실 외에는 하늘에 한점 부끄럼 없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조조를 사랑하고 있다. 조조에게 내 생활 패턴을 맞추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이모랑 지내고 있으니 친구들도 가끔 만나지만 혼자 있을 때는 조조를 혼자 집에 둘 수 없어서 약속 자체를 잡지 않았다. 간혹 내 상황을 양해해주는 사람들과는 집 근처 공원이나 애견유치원에서 조조를 데리고 만났다. 원래도 좁았던 내 인간관계는 이제 와르르맨션. 정말 없다시피 하게 됐다. 

생방송을 하던 직업에서 클립형 유튜버로 전환한 것도 조조 영향이 컸다. 긴 시간 방송 하고 잠을 자고 방송 준비를 하는 일정으로는 조조와 충분히 놀아줄 수가 없었다. 좁은 원룸에서 악착같이 아파트로 이사하게 된 것도 조조때문이었다. 혼자서는 그럭저럭 지내던 원룸이었는데 조조 집을 만들고 나니 이제 내가 잘 곳이 없었다. 방송 끝나고 다리를 오무려 새우잠을 자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 이사를 하게 됐다. 난 돈을 벌고 싶긴 하지만 또 돈을 벌기 위해 무엇이든 열정적으로 할 수 있는 성향은 못된다. 그래서 아마도 이번 생에 부자가 되기는 어렵겠지만 ㅎㅎ 그래도 돈을 벌어야 하는 원동력이 있다면 그것 또한 조조다. 조조가 살아 있는 동안 조금이라도 더 좋은 환경을 주고 싶어서. 내가 돈을 벌기 때문에 조조가 아플 때 바로 병원에 데려갈 수 있었다. 슬개골 수술할 때도 선뜻 200만원 남짓하는 검사, 수술, 치료비를 내 힘으로 낼 수 있었다. 5년 이상 연락을 끊었던 이모와 다시 만나게 된 것도 조조 덕분이었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인생 2막이 열린다고 하는 것처럼, 내게 아들이나 다름없는 조조를 만난 이후부터 내 인생도 바뀌었다. 조조가 내 인생에 들어오면서 나는 비로소 세상에 얼마나 감사할 일 투성이인지 알게 됐다. 시간이 얼마나 유한한지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됐다. 복덩이 조조. 사랑하는 조조. 조조가 내게 의지하는 것보다 내가 조조에게 의지하는 것이 훨씬 더 크다. 조조는 내 인생을 완성해준다. 조조를 만나기 위해 내가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게 반려견은 그런 의미다. 

무지하고 무책임하고 비겁했던 내 과거가 있기에 되도록이면 다른 사람들을 지금의 내 기준으로 보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안타까운 일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픈 것은 어쩔 수 없다. 동물이 우리에게 주는 사랑과 가르침이 얼마나 큰지, 반려 동물이 보호자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존재인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해줄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점점 더 조성되면 좋겠다고 생각해본다.



Comments

Anonymous

Truely touching and beautiful. I mean it. This is why i cannot have a dog at this stage of my life, but later, maybe. :)

Ronny [Rendition]

It's so beautiful to see you treat Jojo as a companion instead of just a pet. 🥰 You're a good mom to him. This post is the perfect opportunity to rewatch: http://vod.afreecatv.com/PLAYER/STATION/29539552

James Yi

은젤님 글들을 하나 하나 읽을수록 참 사려 깊고 좋은 면으로 여린 사람이구나란걸 느껴요. Sensitive 가 아니라 delicate. 물론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지만요 하하. 아지도 은젤님이 죄책감 가질정도로 힘들지는 않았을거에요. 어리다고 다 괜찮은건 아니지만 말 그대로 어렸으니까 몰랐잖아요. 그당시에 지금의 지식과 여건이 있었으면 당연히 잘 해줬겠죠. 사랑받아가면서 살았잖아요. 가족을 원망하며 살 수 있는 동물은 사람뿐이래요. 조조도 마찬가지일거에요. 이렇게 사랑을 듬뿍 받으며 행복할거에요. 애견샵에서의 만남도 운명적인거 맞죠. 세상에 강아지랑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저도 이 글 읽고 "강아지 공장" 처음 들어봤는데... 확실히 이런건 여러 사람이 많이 알아야 하지만 모르는 거네요.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면 좋겠어요. 저도 어릴때 한국에 있을때 강아지가 있었는데 몇개월 밖에 안됬을때 동생 강아지랑 제 강아지랑, 그 아이들 엄마 까지 다 개장수한테 도난 당했어요, 약 묻은 고기로 꾀어서 데려갔다고 들었는데... 너무 큰 쇼크라 너무 심하게 울어서 병원도 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