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있는 Flex 혹은... (Patreon)

예전에 음악을 처음 시작할 때 처음 사용한 미디 프로그램은 큐베이스였다. 영상은 베가스. 둘 다 윈도우 기반 프로그램들이다. 대학생 때 아빠가 과제용으로 사준 LG 노트북을  이용했는데 프로그램들이 워낙 무거워서인지 굉장히 버벅거렸다. 겨우 겨우 연습해볼 정도.

그런데 미디와 영상 모두 독학을 해야했던 나로서는 주변 친구들이 어떤 프로그램을 많이 사용하는지가 중요했는데(친구들한테 물어봐가며 익혀야 하니까) 대부분 미디 프로그램으로 로직을 사용하고 있었다. 윈도우 컴퓨터와 로직은 호환되지 않았지만 친구들이 많이 사용하는 프로그램이니 나도 관심이 갔다. 나도 로직 쓰고 싶은데... 로직을 사용하려면 맥을 사야하나...? 하고 검색해보니 헉. 맥 제품은 왜이렇게 비싼지. 그 때 나는 매달이 적자로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어떤 컴퓨터든지 컴퓨터를 사는 것 자체가 부담이었는데, 맥은 그 중에도 유독 비쌌다.

그런데 당시 내 주변에 정품 맥을 사용하는 사람은 정말 손에 꼽을만큼 적었다. 믹싱, 마스터링 기사님 스튜디오나 정식 녹음실에서는 정품 맥을 볼 수 있었지만 당시 나와 지갑 사정이 비슷하거나 나보다 조금 나은 정도이거나 한 친구들은 거의 다가 조립컴퓨터로 맥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사용하면서 불편한 점도 딱히 없다고 했다. 요즘은 개조 기술이 좋아서 거의 정품만큼 안정적으로 작동한다고. 그래서 궁금해서 친구에게 물어봤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다들 개조해서 맥을 사용할 수 있으면 대체 정품 맥은 누가 사? 애플 망하는거 아냐? 개조맥 기능과 정품맥 기능에 차이도 거의 없는데 가격은 훨씬 비싸잖아. 디자인 때문에 사는건가? "

그 때 그 친구가 대답했다.

"아무래도 정품이 그래도 더 안정적인 것도 있고. 대부분 개조맥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 여유가 되면 그때는 정품 맥을 사더라고. 일종의 보답? 그동안 개조로 잘 썼으니까 이젠 정품 사줘야지 하는 느낌? "

2019년 말에 나는 새 조립 컴퓨터를 맞췄고 약 200만원이 들었다. 모니터 구매 가격까지 하면 260만원정도 들었지. 그 금액도 내게는 너무나 크게 느껴졌기 때문에 정품 맥을 산다는 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아예 생각조차 안했다. 엄두가 나고 안나고 자체도, 사려고 각이라도 잡아봤어야 해보는 생각이지. 

그렇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개조맥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약 5년동안 총 3대의 개조맥 컴퓨터를 거쳐왔다. 음악을 시작할 때 한대, 방송하면서 1대, 2019 말 1대. 2019버전 개조맥에는 '은번개' 라는 이름을 붙였다. 번개처럼 빠르게 작동해서 작업효율을 높여달라는 소원을 빌었다. 그리고 올해 2021년이 됐다.

ASMR은 다른 보통의 유튜브 영상들과 달리 영상 길이가 최소 30분 이상이고 또 나는 얼마전부터 일러스트 등 다른 작업들도 병행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은번개는 번개처럼 따라와주진 않았다. 방송에는 적합했지만 영상편집이나 기타 작업용으로는 아쉬웠다. i9 8코어 스펙인데도 그랬다. 예컨대 지난달 업로드했던 스파 영상은 버벅거림과 멈춤때문에 편집 시간이 훨~씬 더 많이 소요됐다. 컴퓨터가 문제 없었다면 빨리 끝났을 작업에 최소 4시간은 더 소요되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4시간보다도 더 많은 시간이 잡아먹힌 것 같기도 했다. 

컴퓨터를 새로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은번개는 방송용으로 사용하고, 오직 작업용으로 사용하는 컴퓨터를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더 좋은 스펙으로 조립컴퓨터를 새로 맞출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냥 자연스럽게, 정품 맥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때가 되었다는 그 느낌이 왔다. 그 옛날 친구가 말했던 대답이 문득 기억났다. 아하. 맥을 누가 사나 했더니, 나도 이제 그 한명이구나. 

사실 "누가 정품 맥을 사?" 라는 내 옛날 질문 자체가 정말 우스운 질문이다. 가까운 예로, 나만 해도, 독점 사이트 컨텐츠 유출로 그렇게 마음고생을 했는데, 어떤 유저는 그렇게 질문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공짜로 볼 수 있는데 왜 돈을 내?" 내가 과거에 했던 질문과 똑같다. 귀찮게 굳이 우회로까지 찾아서 볼만큼 은젤 영상을 좋아하지만 돈은 내기 싫은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내 영상을 올바르지 않은 경로로만 소비한다면 난 결국 수입이 없어지고 영상 제작을 포기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소비자들은 한 명의 제작자를 잃게 된다. 

정품 맥을 사야한다고 생각하게 된 마음도 같았다. 우회로를 찾아서 사용해왔을 만큼 맥 운영체제가 내게 필요한게 확실해졌다면, 이제는 그들에게 지갑을 바칠 때가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개조맥만 사용한다면 맥 컴퓨터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소비자들은 더 이상 업그레이드 된 맥 운영체제를 사용할 수 없게 될 것이고. 난 애플이 절대 망해서 사라지지 않고 앞으로도 더 좋은 제품을 계속 계속 만들어 주었으면 한다. 이제, 지갑 사정이 여의치 않아 개조맥을 사용하는 친구들 대신, 그들보다 비교적 여유가 생긴 내가 애플의 노고에 정당한 대가를 지불할 때가 된 것이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어떻게든 샅샅이 뒤지고 찾고 하면 우회로로 은젤 영상을 볼 수도 있었을텐데, 꾸준히 응원해주는 후원자들에게 너무 고마워서 마음이 찡해졌다. 몇 몇 후원자분들은 딱히 리워드를 신청하시지도, 내게 뭔가를 요청하시지도, 어떤 재촉도 하지 않으시면서 그냥 조용히 응원해주시기도 한다. 사실 매달 5달러, 약5000원 이상씩 묵묵하게 후원한다는 것, 정말 쉽지 않은 일 아닌가...? 그건 은젤이라는 제작자가 사라지지 않고 계속 영상을 만들어주길 바라는 마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감개무량하고 마음이 찡해지는 것이다.

컴퓨터를 결제했다. 650만원. 결제하고 나니 곧바로 핸드폰으로 문자가 날아왔다.  "신용카드 한도액의 90%를 사용했습니다. 한도 상향이 필요하면 어쩌구 저쩌구" ㅋㅋ 아이 깜짝이야. 이런거 알려주지마! 

이모에게 컴퓨터를 주문했다고 하며 가격을 말하니 이모가 처음에 자기도 모르게 펄쩍! 뛰며 놀랐다가 이내 "일하는 장비인데 필요하면 투자해야지~" 하고 빠르게 덧붙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어마무시한 금액이긴 하네. 첫 Imac (아이맥)을 놓을 책상을 정리했다. 배송은 1월 말에나 온다지만 이미 설레발. 제~일 처음 개조맥을 맞추었던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서인지 더 가슴이 콩딱콩딱 하는 것 같다. 그 땐 정말 미래가 막막했고 가난했는데. 은비 많이 컸네, 10코어 아이맥을 다 사고.

연말부터 연초까지, 영상들을 다시 정리하고 업로드하면서 사실 몸과 마음이 너무 많이 지쳐서 새로운 자극제가 필요하기도 하던 참이었다. 내 생에 첫 정품 맥이 부끄럽지 않게, 650만원이 헛된 Flex가 되지 않게, 부지런히 일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