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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물음


※릴리 릴리움 시점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릴리 님——.”


눈앞에서 알레어 짱이 즐겁게 웃고 있습니다.

그녀가 저에게 향하는 눈길 속에 담긴 감정은 틀림없는 호감.

릴리는 그걸 영광으로 여기면서도 그 마음을 받아줄 수 없다는 괴로움에 질식할 것만 같습니다.

릴리 같은 사람이 이런 사랑을 받게 되다니, 예전엔 상상도 못했던 일입니다.


릴리는 동성애자입니다.

처음으로 그걸 깨달았던 건 수도원에서 연상의 선배를 눈으로 좇고 있는 스스로를 자각했을 때였습니다.


수도원은 어떤 의미로는 폐쇄된 사회입니다.

외부와 아무런 교류도 없는 건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수녀들은 수도원 안에서 서로 몸을 맞대고 생활합니다.

당연히 비밀스런 관계가 형성되기도 쉽습니다.

릴리는 그 안에서 릴리에게 수녀로서의 기초를 지도해준 선배한테 동경과도 비슷한 마음을 품었습니다.


선배는 쾌활하고 마음 넓은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수녀들한테 받는 인망도 두텁고, 그녀를 연모하는 수녀는 적지 않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람으로서 느끼는 매력입니다.

릴리가 선배한테 품은 감정은 더욱 적나라한 감정이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의 감정은 동경에 가까운 감정이었던 걸 알 수 있습니다.

릴리는 처음으로 친근감을 느낀 선배에게 착각과 비슷한 형태로 이끌렸던 거겠죠.

하지만 당시의 릴리는 그걸 알 수 없었습니다.

나날이 깊어가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결국 한계를 맞이해 고백했고—— 호되게 차였습니다.


이튿날부터 수도원의 폐쇄적인 공간은 릴리에게 바늘방석으로 변했습니다.

누가 밀고한 건지는 모릅니다.

선배가 남들한테 폭로했다고 믿고 싶진 않지만 어쨌든 릴리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습니다.


릴리의 아버지—— 사라스 릴리움은 당시 재상의 자리에 있었고, 릴리도 머잖아 추기경에 오를 거라는 말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대놓고 업신여김을 받는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정령교는 동성애에 부정적이었습니다.

릴리는 보이는 형태로든, 보이지 않는 형태로든 여러 가지 차별을 당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레이 씨 때 일은 정말로 충격적이었어요.)


알레어 짱과 메이 짱의 양어머니인 레이 테일러 씨—— 그녀 또한 여성을 사랑하는 동성애자였습니다.

하지만 스스로의 성적지향을 잘못이라고 부끄럽게 여기던 릴리와는 다르게 레이 씨는 당당하게 그건 죄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릴리를 헐뜯고 있던 수녀와 레이 씨가 나눈 대화는 릴리한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레이 씨는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지극히 논리적으로 상대를 설득했습니다.


논파가 아닙니다.

레이 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편견에서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


그 커다란 도량에 릴리는 완전히 두 손 들고 말았습니다.

단순한 동경이 아닌 진짜 첫사랑이 이때 시작된 겁니다.


하지만 레이 씨에겐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건 지금의 레이 씨의 반려자인 클레어 님입니다.

레이 씨와 클레어 님이 함께 걸어온 길은 험난하면서도 충실하고, 농밀했기 때문에 거기에 다른 사람이 끼어들 틈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게 사랑이라는 감정.

릴리는 이런저런 수단을 써서 레이 씨한테 다가갔습니다.

사랑이란 저절로 빠지게 되는 것. 그게 레이 씨의 말이었습니다.

릴리 스스로도 머리로는 무리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레이 씨를 좋아하는 마음은 멈출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레이 씨는 클레어 님 말고 다른 사람에겐 애정을 품을 생각이 없어 보였습니다.

함께 온갖 모험을 함께 헤쳐 나왔고, 마침내 힘을 합쳐 세계의 위기마저 구해낸 두 사람의 인연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해졌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레이 씨를 포기할 생각은 없지만 아마 무리겠지, 싶은 게 릴리의 솔직한 마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알레어 짱의 호의를 받아들일 수 있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쉬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레이 씨와 클레어 님의 딸답게 정면으로 당당하게 다가오는 알레어 짱의 모습을 눈부시게 느꼈지만, 릴리는 아직까지 알레어 짱을 연애 대상으로 볼 수 없었습니다.

알레어 짱이 5살쯤 됐을 때부터 쭉 알고 지낸 사이입니다.

릴리에게 알레어 짱은 딸이나 여동생 같은 존재입니다.

연애적인 의미로 바라볼 수 없는 겁니다.


이건 결코 알레어 짱한텐 말하지 않을 거지만, 그런 의미에선 릴리는 메이 짱이 신경 쓰였습니다.

아뇨, 메이 짱도 딸이나 여동생 같은 존재라는 점은 마찬가지지만, 메이 짱이 가끔씩 보여주는 어른스러운 표정이나 어딘가 옛날의 레이 씨를 생각나게 만드는 위태로움 때문에 그녀를 그냥 내버려둘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이 마음도 메이 짱이 레이 씨와 닮았기 때문에 생겨난 착각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맹렬하게 호감을 전하려 다가오는 알레어 짱을 흐뭇하게 생각하는 한편, 깨닫고 보면 메이 짱을 눈으로 좇고 있습니다.


메이 짱이 알레어 짱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물론 눈치채고 있습니다.

알레어 짱은 그런 쪽에 둔감한 측면이 있어서 아직 깨닫지 못한 모양이지만 메이 짱의 마음은 레이 씨나 클레어 님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을 겁니다.

딸들이 그런 관계로 발전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두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릴리는 그걸 확인하는 게 두려워서 도저히 물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릴리의 마음이야 어쨌든, 메이는 릴리를 그다지 좋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야 당연한 일이겠죠.

릴리는 메이 입장에선 좋아하는 사람의 짝사랑 상대니까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마음먹고는 있지만, 가끔씩 메이 짱이 보여주는 질투의 표정에 살짝 상처받을 때가 있습니다.


결국 현재 상황은 알레어 짱⟶릴리⟶메이 짱⟶알레어 짱이라는 삼각관계가 교착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물리적인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관계의 변화도 적었지만 이제 한 학교에 다니게 되었으니 앞으로 이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는 미지수입니다.

그게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알레어 짱도 메이 짱도…… 그리고 릴리도 변하지 않을 수 없는 거겠죠.


(하지만 릴리는…….)


릴리에겐 죄가 있습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한때 아버님—— 사라스 릴리움에게 조종당해 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저지른 죄의 후회는 계속…… 속죄의 순례를 마치고도 여전히, 아니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릴리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릅니다.


자칫 릴리의 약한 마음은 모든 걸 아버님 탓으로 돌리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릴리는 조종당했을 뿐이고,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식으로요.

그런 짓이 용납될 리가 없는데.

릴리는 그런 스스로의 나약함과도 마주해야만 합니다.


(애초에 릴리에게 누군가를 좋아할 자격 같은 게 있는 걸까요.)


레이 씨를 향한 마음이 예전의 뜨거움을 잃은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죄책감입니다.

설사 재판에서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다는 이유로 죄를 묻지 않았다고 해도, 신앙으로 살아온 릴리는 저 자신의 죄에서 눈을 돌릴 수 없습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을 빼앗았다는 대죄.

그건 어떤 행동으로도 속죄할 수 없는 릴리의 오점입니다.


(릴리는 평생에 걸쳐 죄를 속죄하면서 살아가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러니까——.)


그런 릴리의 삶에 누군가를 끌어들여도 괜찮을까. 릴리는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 학원에 입학한 것도 혹시 죄를 갚을 방법에 대한 이정표를 얻을 수 있을까 싶었기 때문입니다.


“릴리 님, 뭔가 복잡한 생각을 하고 계신가요?”

“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앞에서 알레어 짱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자 시몬 짱도, 그리고 메이 짱까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이래선 안 되죠, 너무 생각에 잠겼어요.


“죄, 죄송해요. 잠깐 멍하니 있었어요.”

“그런가요? 컨디션이 안 좋으면 꼭 말씀해주시기에요?”

“괘, 괜찮아요.”

“그렇게 사양하지 말고요. 자, 무릎베개를 해드릴 테니까 어서 누우세요.”

“네에에?!”

“……릴리 님이 안 할 거라면 메이가 누울래.”

“너희들은 항상 이런 식이야?”


알레어 짱과 얘기하고 있으면 무심코 죄에 대한 걸 잊어버릴 것 같습니다.

그건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에요.


(신이시여…… 릴리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몇 번이나 되풀이 했던 물음.

하지만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신 분의 계시가 죄인에게 내려올 리는 없었습니다.


――――――

이번에 제1장이 끝났습니다. 제2장이 시작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립니다.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Comments

キョウル

잘 보았습니다! 2장도 열심히 기다리겠습니다 :>

June

이것을 세계가 매우 가치있게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