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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번역은 "와타오시 번역"의 협력으로 실현되었습니다.고마워요, "와타오시 번역"


80. 분화 후의 바우어 왕국


삿살 화산 분화의 피해는 막대했습니다.

귀족원 의원 중 무려 3분의 1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의회의 기능은 마비되기 직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의장은 목숨을 건졌다는 점. 그리고 아버님이 놀라운 수완을 발휘해 수습한 덕분에 간신히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빈자리를 죽은 의원들의 혈족으로 메꾸는 방식으로 어느 정도 수준까지 기능을 회복한 의회가 제일 먼저 논의한 건, 서거하신 로세이유 폐하의 후계자는 누구인가에 대한 논의였습니다.

당연히 제 1왕위 계승권자인 로드 님이 차기 국왕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작 중요한 로드 님이 화산 분화 직전에 행방불명됐기 때문입니다.

왕실의 증언으로는 로드 님이 직접 삿살 화산 기슭에 있는 마을로 가서 주민들이 피난하도록 설득하러 갔다고 합니다.

레이가 그 마을에 대해 살짝 언급했을 때는 힘들 것 같다는 듯이 말했는데 사실은 신경을 써주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하필이면 이런 타이밍에——!)


억측에 불과하지만 로드 님은 분화에 말려든 게 분명하겠죠.

아직 안부를 알 수는 없어도, 분화가 일어난 지 5일째에 접어드는 지금까지도 아무런 소식도 없다는 걸 볼 때, 무사히 계실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듭니다.

의회는 여러 주장이 뒤섞여 엉망이었지만 어쨌든 지금은 긴급을 요구하는 사태인지라 세인 님을 즉위시키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습니다.

왕국이라는 정치형태를 가진 나라에서 왕위를 비워둔 채로 위기를 극복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아버님은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가요…….”


신문을 읽으면서 저도 모르게 혀를 차고 싶어졌습니다.

저는 지금 왕립학교 기숙사의 제 방에 있습니다.

레이가 무슨 일인가 싶어서 저를 돌아보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아버님의 부정을 끝까지 추궁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는데 레이는 제 주장에 반대했습니다.

지금은 아버님의 정치력이 반드시 필요한 시기라면서요.

부정을 저질렀다고는 하나, 아버님이 정치가로서 지닌 힘은 진짜입니다.

지금 아버님을 정치판에서 끌어내리는 건 득이 되지 않는다는 게 레이의 주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 아버님은 지금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르려고 하는 중입니다.


“뭐라고 쓰여 있나요?”


제 짜증이 폭발하기 직전이라는 걸 눈치챈 건지, 레이가 물었습니다.


“세인 님의 즉위가 물 건너간 모양이에요.”


저는 내뱉듯이 말하면서 신문더미를 레이한테 휙 던져 건넸습니다.

기사에 의하면 세인 님을 즉위시키자는 얘기는 없던 일이 되었고, 대신 아버님을 필두로 하는 로드 님 파벌 귀족이 정권운영을 대행한다고 합니다.

그런 바보 같은 소리가 어디 있을까요.


“왕국의 주권은 어디까지나 국왕에게 있어요. 귀족원이 지금 해야 할 일은 한시라도 빨리 다음 국왕을 선출하는 것일 텐데.”


신문의 논조도 제 견해와 거의 일치했습니다.

개중에는 귀족들이 벌인 쿠데타라고 표현한 신문도 있었습니다.


물론 모든 귀족이 지금의 흐름에 찬성하고 있는 건 아닌 모양입니다.

하지만 귀족원 의원 중 이번 사고로 피해를 입고,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대부분이 세인 님 파벌과 유 님 파벌이었다는 점이 아프게 작용했습니다.

유 님의 실각으로 인해 유 님 파벌 중 많은 사람이 로드 님 파벌로 줄을 갈아 탄 상황이고, 애초부터 세인 님 파벌은 세력이 미약한 편이었다는 점도 크겠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일 중요한 로드 님이 행방불명.

지금 바우어 귀족의 상황은 가장 큰 세력이 통제수단을 잃어버린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나라가 하나로 뭉쳐서 국가의 위기에 맞서야할 때. 민중들은 불안감에 곤혹스러워하고 있어요.”


분화로 퍼진 화산재와 화산탄의 영향으로 왕도 주변의 농작물은 남김없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양심 없는 상인들이 물자 부족을 예견하고서 사재기를 벌이는 바람에 왕도 주변의 물가는 날마다 고공행진을 거듭했습니다.

아버님과 임시정부——제가 임의로 붙인 이름이지만요——도 배급을 실시하고는 있지만 그것도 언제까지 버틸는지.


저도 이 상황을 수수방관하고 있을 생각은 없습니다.

아버님이 길을 잘못 든다면 그걸 바로잡는 게 딸의 역할.

그건 알지만 제가 그저 반대의견을 표출한다고 해서 아버님이 거기에 귀를 기울이실 거라곤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아버님과 귀족들을 움직이게 만들려면——.


“레이, 기별을 넣어주세요. 세인 님을 만나 봬야겠어요.”


저는 세인 님에게 행동을 촉구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아버님이 한 일 탓에 즉위가 보류되기는 했어도 원래라면 세인 님이 차기 국왕입니다.

어쩌면 왕실이 단호한 태도로 나가면 아버님과 귀족들도 생각을 바꿀지도 모르겠다는 계산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어렵지 않을까요.”

“어째서인가요!”


레이가 난색을 표하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험악해졌습니다.

마음을 억눌려야한다고 생각은 하는데 분화 이후로 여기저기 바쁘게 뛰어다닌 탓인지 쉽게 자제가 되지 않습니다.


“클레어 님은 세인 님을 억제하고 있는 도르 님의 딸입니다. 세인 님 파벌이 보기에는 원수나 다름없는 입장이니까요.”

“……윽.”


레이의 지적은 타당했습니다.

왕실을 업신여기고 있는 자의 딸이 하는 소리에 왕실이 귀를 기울일 리가 없습니다.

지금의 저는 그런 간단한 사실조차 누가 지적해주기 전까지 깨닫지 못했던 겁니다.


“클레어 님, 너무 골머리를 앓지 않는 편이 좋아요. 분화가 일어난 날부터 지금까지 클레어 님은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로 노력했습니다.”


레이가 제 수고를 칭찬해줬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그런데 아버님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지 않아요.”


지금 아버님의 행동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평소에 언제나 바우어 귀족이라면 응당 이래야 한다는 말씀을 입에 담으셨던 아버님이 하는 일이라곤 생각하기 힘듭니다.

신문에서는 아버님이 이번 기회에 왕권을 찬탈하려는 게 아니냐는 소리까지 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상으로 삼았던 아버님을 그런 식으로 폄훼하다니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기분입니다.


대체 어떻게 된 건가요, 아버님…….


“클레어 님은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하고 계세요. 지금은 조금쯤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요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주무시지 않았잖아요.”


그 말에 뺨을 쓸어보니 기분 탓인지 피부도 거칠어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레이가 정성들여 관리해주고 있기는 하지만 요새는 목욕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수면부족도 심각합니다.

오늘내일 안에 문제가 생길 정도는 아니지만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아직까진 괜찮아요. 괜찮기는 하지만——.”


그 말과 함께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레이에게 가까이 다가가,


“……하지만 아주 약간, 지쳤어요. 잠깐만 이렇게 있을 수 있게 해 줄래요?”

“크, 클레어 님?!”


저는 가만히 레이에게 몸을 기댔습니다.


“레이가 있어줘서 다행이에요. 저 혼자였다면 진즉에 쓰러졌을 거예요.”

“클레어 님 괜찮으세요? 아뇨, 괜찮지 않아 보이네요. 저한테 응석을 부리는 클레어 님이라니 괜찮을 리가——.”

“부끄럼기가 온 거예요. 이런 식으로 쓰는 표현 맞죠?”

“어어, 그게 맞기는 한데요…….”


제 갑작스러운 행동에 레이는 허둥거렸습니다.


“저도 누군가한테 응석을 부리고 싶을 때 정도는 있다고요. 예전에는 레네한테 곧잘 이러고는 했어요.”

“……아아, 그렇군요.”


그 레네도 지금은 여기에 없습니다.

레이가 없었다면 어땠을지 생각해보면 오싹합니다.


“스스로가 귀족임은 제 긍지 중 하나지만 가끔은…… 정말로 가끔이지만 이런 의무감에서 자유로워진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할 때가 있어요.”

“좋은 일이잖습니까. 귀족 같은 건 그만둬버리자고요.”

“그럴 수는 없어요. 제가 지금까지 사치를 부릴 수 있었던 건 이런 유사시에 행동에 나설 의무를 부여받았기 때문인걸요.”

“완고하네요, 클레어 님은.”


레이가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럼 농담삼아라도 괜찮으니까 가르쳐 주세요. 귀족이 아니게 된다면 뭔가 해보고 싶은 게 있으신가요?”


레이가 웃으면서 갑자기 그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귀족이 아니게 된다면……?


“……그러네요…….”


그 상상은 저에게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제게 있어서 스스로가 귀족임은 숨을 쉬는 것 마냥 당연한 일이라서 귀족이 아니게 된 자신을 상상해본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아뇨, 떠올려보니 누군가한테 같은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요리나 재봉이라도 배워보고 싶네요.”


열심히 생각한 끝에 제가 떠올린 건 그런 시시한 일들이었습니다.


“의외의 답변이네요. 그런 평민 같은 일을요?”

“당신한테 잔뜩 신세를 지고 있는걸요. 귀족이 아니게 된다면 그런 일 말고는 보답할 방법이 없어요.”


제 대답에 레이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뭔가요, 그 표정. 아, 저 벌써 며칠째 목욕을 하지 못했죠. 냄새나나요?”

“아뇨, 전혀요. 오히려 좋은 향기가 납니다.”


이 사람은 무슨 소릴 꺼내는 건가요.


“거짓말 마세요. 마침 잘 됐으니 목욕하러 가죠.”

“네.”


저는 레이를 데리고서 욕탕으로 향했지만 분화의 영향으로 욕탕 온도가 불안정한 탓에 기숙사 온천은 사용이 금지된 상태였습니다.


“아— 진짜!”

“자자. 클레어 님 진정진정.”


결국 언제나처럼 제 방에서 레이가 몸을 닦아주는 걸로 목욕을 마쳤습니다.

따뜻한 타월의 감촉에 후우, 한숨을 내쉬면서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습니다.


(어떻게든 해야…… 어떻게든…….)


그럼에도 마음만이 앞설 뿐, 구체적인 해결책은 뭐 하나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81. 추억


※도르 프랑소와 시점 이야기입니다.


“그럼 부흥세 도입 건은 만장일치라고 봐도 되겠군?”

“이의 없소이다.”


내가 확인 차 묻자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이 찬성의 뜻을 표했다.


“그러면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제군들 내일 다시 만나지.”


해산을 선언하자, 『임시정부』라는 이름뿐인 먹이에 달려든 자들이 자리를 떠났다.

나는 감정이 담기지 않은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야— 과연 도르 님이시군요.”

“정말입니다. 수복에는 돈이 들죠. 물론 우리 귀족들도 한 몸 바칠 각오가 됐지만 역시 이런 고통은 평민들한테도 나눠줘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질릴 정도로 들은 아부와, 참고 들어주기 힘든 헛소리에도, 나는 태연히 만족스러운 웃음으로 대답했다.

가식적인 태도를 꾸며내는 이미 익숙하다.


“알드원 백작도 르론 자작도 고맙군. 그대들이 거들어준 점에 감사하고 있네.”


일말의 주저도 없이 마음이 담기지 않은 감사 인사를 입에 담았다.


“당연한 일이지요. 저는 예전부터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도르 님만큼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시는 귀족은 달리 없다고요.”

“이야, 그 말대로입니다.”


백작과 자작은 그런 소리를 입에 담고 있었지만 원래 그들은 아샤르 후작 파벌이었다.

후작이 실각하자마자 꼬리를 흔들며 이쪽으로 달라붙는 두 사람을 기쁘게 맞아주었다.

그들은 의리고 인정이고 없는 혐오스런 정치꾼들이다.

나와 함께 파멸해버리기엔 안성맞춤이지.


“고맙네. 그러면 나도 그만 실례하도록 하지. 아아, 그래. 헌금도 고맙게 받았어. 유익하게 쓰도록 하겠네.”


자리를 떠나기 전에 감사 인사를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말이 헌금이지 그건 빼도 박도 못할 뇌물이었다.


“네네, 얼마든지요.”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프랑소와 공작.”


알랑거리는 두 사람을 뒤로 하고서 나는 회의장을 나섰다.

원래는 성역이나 다름없는 이 장소를 이런 식으로 사용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면서.


◆◇◆◇◆


저택에 있는 내 방으로 돌아와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무거운 피로가 느껴진다.

아무리 이 몸과 함께 부정 귀족들을 단번에 일소할 계획이라고는 해도, 백성들한테까지 희생자가 나와서는 안 된다.

삿살 화산의 사후처리에 온 힘을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미리 레이의 조언에 따라 화산 분화에 대비하고 있었는데도 상정해둔 피해 규모를 아득히 뛰어넘은 상태다.


“부흥을 위한 증세라고? 경세제민도 모르는 어리석은 것들이.”


이 상황에서 증세 같은 짓을 벌이면 민중의 반발을 사게 될 게 당연하다.

저 자들은 백성을 의사소통이 가능한 노예라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백성들이 진정으로 분노를 드러냈을 때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되겠지.


“……딸한테 경멸어린 시선을 받는 건 조금 쓰라리지만.”


분화가 일어나기 전에 국왕 폐하로부터 부정 귀족 적발의 임무를 하사받고 나를 규탄하러 왔을 때 딸이 지었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믿고 있던 이상에게 배신당했다—— 딸의 얼굴의 실망의 기색이 여력하게 떠올라 있었다.

별볼일 없는 귀족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사랑하는 귀여운 딸한테 그런 시선을 받는 건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하지만 이제 곧……. 이제 조금 남았어, 밀리아.”


나는 책상 위에 세워 둔 사진을 향해, 쌓이고 쌓인 마음을 담아 그 이름을 불렀다.


원래는 나도 그다지 칭찬 받을만한 귀족은 아니었다.

내가 달라진 건 밀리아와 만났을 때부터였다.

밀리아는 고결한 여성이었다.

후작가의 영애로 나고 자라, 불의와 악행을 용납하지 못하는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다.


『프랑소와 공작, 잠깐 괜찮을까요?』


어떤 파티에서 처음으로 내게 말을 건넨 그녀는 내가 가진 공작이라는 직함에도 겁내지 않고 현재 귀족들의 세태에 대해 당당하게 비판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저 막연히 귀족이라는 신분을 달고 있었을 뿐인 나에게 있어서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눈부시게 느껴졌던 게 기억난다.

그 뒤부터 그녀와 만날 때마다 서로 기탄없는 의견을 나눴다.

남들이 보기에는 로맨틱함이라곤 전혀 없는 대화라고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겐 그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즐거웠다.


얼마 후, 나는 그녀에게 청혼했다.

내 프러포즈에 그녀의 반응은 이러했다.


『제가 가진 이상을 함께 나누어 가져줄래요?』


그녀에게 있어서 이상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보통 무거운 게 아니었다.

함께 이상을 나눠 가진다—— 그건 다시 말해 부패해 가는 귀족계에 함께 맞서 싸울 각오가 있냐고 묻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도 그땐 젊었다.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제대로 깨닫기도 전에 나는 그녀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부부생활은 아무런 문제없이 순탄했다.

나는 정치계에서, 밀리아는 사교계에서 각자 스스로의 이상을 내걸고 싸웠다.

자식복도 타고났다.

우리는 밀리아를 꼭 닮은 아기에게 클레어라고 이름을 지었다.


클레어는 밀리아와 정말 많이 닮았다.

생김새도 그렇지만 성격마저도.

내가 너무 어리광을 받아준 탓에 꽤나 제멋대로 구는 딸이 됐지만 심지는 바뀌지 않았다.

귀족이라는 자각을 누구보다도 강하게 품고서, 자기 자신을 엄격히 채찍질하는 딸이었다.


밀리아한테도 불같은 일면이 있었다.

도깨비 소굴이나 마찬가지인 귀족계에 비하면 그녀는 너무나 결벽적인 성격이었다.

밀리아는 아샤르 후작을 공공연히 비판했다.

당시부터 아샤르 후작에게는 그다지 좋지 못한 소문들이 따라다니고 있었지만 가문의 권세와 명성 탓에 아무도 공공연히 비판하지 못했다.

하지만 밀리아는 달랐다.

그녀는 아샤르 후작의 그늘에 있는 어두운 부분에 대고 정의와 공정성을 설파했다.


그리고 그 사건이 일어났다.


마차사고로 처리됐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건 아샤르 가문이 벌인 모살이다.

이상하게도 사고 당시의 기억이 흐릿하지만, 사고에서 회복해 일터에 복귀한 나에게 후작이 말한 한 마디만큼은 결코 잊을 수 없다.


『살아남고 말았나. 운이 나빴군.』


그 자리에서 그 자식을 죽여 버리지 않았던 게 내 인생 최대의 실수이자 최고의 선택이었다.

권력을 써서 역으로 모살해버리는 것도 가능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 이유는 어째서인가.


예전처럼 오만불손한 귀족으로 구는 건 이제 나에겐 용납될 수 없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가 예전으로 돌아가 버리면 모든 게 허사로 돌아간다.


그래, 밀리아의 죽음마저도.


나에겐 분노에 몸을 맡기고서 녀석을 죽이는 짓조차도 용납되지 않았다.

그걸 깨달았을 때, 나는 처음으로 밀리아가 말했던 이상이라는 단어의 무서움과 그게 얼마나 사람을 옭아매는지를 알았다.


나의 복수와도 가까운 계획이 시작됐다.

아샤르 가문, 더 나아가 이 썩어빠진 귀족 사회를 한순간에 정리한다——오직 그걸 위해 지금까지 살아왔다.


뒤에서 손가락질 당할만한 짓들도 수없이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 아샤르 후작과도 맞먹을 정도로 대악당이 되어 있었다.

악을 행하되, 악에 물들지 않는다—— 그 어려움에 얼마나 많이 고민했는지.


그럼에도 나는 여기까지 왔다.

이제 한 걸음…… 딱 한 걸음이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다. 너와 다시 만날 날도 그리 멀지 않았겠지.”


말하고 난 다음, 아니, 그렇지 않겠군, 하고 생각을 고쳤다.

밀리아 같은 고결한 사람이 있는 곳에 죄로 더럽혀진 내가 갈 수 있을 리가 없다.

내가 죽으면 행선지는 지옥이겠지.


“그런가……. 너와 두 번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거구나, 밀리아.”


그건 조금…… 아니 몹시 슬펐다.


하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여기까지 와버린 이상 계속 밀고나갈 수밖에.


“적어도…… 적어도 클레만큼은 구하고 싶었지만…….”


딸은 레이에게 일임해뒀다.

레이는 걱정 말라며 맡아주었지만 내 염려는 가라앉지 않았다.

클레어는 밀리아를 닮았다.

지나칠 정도로 닮았다.

그런 클레어가 살아남는 수치를 감수하려고 할 것인가.


“그녀에게 걸어볼 수밖에 없겠지.”


레이 테일러.

신기한 아이였다.

그녀는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황당무계한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지금까지 결과로서 증명했다.


딸도 몰라보게 달라졌다.

레이는 딸에게 있어서 둘도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런 레이라면, 어쩌면 딸이 품은 삶의 방식마저도 바꿔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이건 내 바람이겠지.”


딸은 이상을 좇는 것보다 살아남는 걸 우선해주었으면 한다—— 그게 내 솔직한 마음이다.

소중한 사람이 이상을 품고 스러지는 모습을 두 번씩이나 보고 싶지 않으니까.


“밀리아…… 부디 클레어를 지켜줘.”


사진 속의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예스도 노도 말해주지 않는다.

당연한 소리다.


하지만 나에겐 그게 죄 많은 내게 내리는 벌처럼 느껴졌다.



82. 쉽지 않은 키잡이


임시정부가 증세를 발표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 왕도에서 시민들이 데모를 일으켰습니다.

학교 기숙사 창문을 열자, 잔뜩 화가 난 평민들이 왕도 중심을 가로지르는 대로를 따라 플랜카드를 들고 행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야 당연하겠죠…….”


화산 분화로 인해 왕도를 비롯해 주변 지역의 농작물은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상인들의 사재기까지 겹치자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가파르게 치솟았습니다.

안 그래도 생활고에 허덕이던 평민들의 불만이 폭발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배급도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저는 레이의 제안에 따라 유 님에게 도움을 청해서 곤궁한 평민들에게 구호물자와 식사를 배급하고 있습니다.

다들 저에게 감사의 말을 건네주었지만, 애초에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건 아버님을 비롯한 임시정부의 폭정 탓입니다.

제가 하는 일들을 자작극이라고 평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할 수 있는 일들에 최선을 다해보죠. 그래도 안 된다면 포기할 수밖에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당신은 너무 낙관적이에요, 레이.”


창문을 닫고서 의자에 앉자, 레이가 제 앞에 차를 놓아주면서 위로하듯이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생각하면 레이처럼 낙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클레어 님이 지나치게 비관적인 거예요. 그러니 옆에서 클레어 님을 모시는 저는 낙관적인 정도가 좋습니다.”

“……그럴 지도 모르겠네요.”


따지고 보면 저한테는 비관론자 같은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제가 완벽주의에 가까운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의 능력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걸 계속 한탄하다 보니 몸에 스며든 버릇 같은 겁니다.


——뭘 하든 어차피 잘 안 풀리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레이는 달랐습니다.

제 눈에 레이는 항상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항상 사고가 유연하고 자연스럽습니다.

어떤 일을 쓸데없이 과대평가하지 않는 대신, 과소평가하는 일도 없습니다.

그런 레이니까 이런 저를 긍정적으로 평가해주는 거겠죠.


“클레어 님. 어쩐지 생각이 자꾸만 나쁜 쪽으로 맴돌고 계시지는 않나요? 미간에 주름이 잡히셨는데요?”

“……여전히 눈치가 빠르네요.”

“클레어 님에 대한 일이니까요. 차라도 한 잔 하면서 숨 좀 돌리세요.”

“그러네요, 잘 마실게요.”


찻잔을 들자 온기를 머금은 달콤한 향기가 코를 간지럽힙니다.


“좋은 향기네요.”

“캐모마일 차입니다. 마음을 진정시켜주는 효과가 있다나요.”


평민들이 다들 힘든 시기에 이런 고급품을—— 하고 꾸짖을 수는 없었습니다.

레이는 이런 일이 벌어질 걸 대비하고서 학교 화단 일부분을 빌려 여러 농작물을 재배하고 있었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캐모마일도 레이가 직접 기른 찻잎이겠죠.


“지금 기분에 안성맞춤이에요. 고마워요, 레이.”

“……정말로 기운이 없으시군요, 클레어 님.”

“네?”


솔직한 마음을 담아 말했는데 어째선지 레이는 걱정스러운 표정입니다.


“평소의 클레어 님이라면, 레이치고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네요, 라고 말씀하셨을 텐데요. 그런데 이렇게 담백한 반응이라니…….”

“저기 말이죠. 저도 순수한 호의에는 감사할 줄 안다고요. 제가 언제나 한 두 마디 덧붙이는 것도 당신이 항상 쓸데없는 소리나 행동을 하니까 그런 거예요.”

“그런가요? 그럼 지금부터라도 쓸데없는 짓을 함께 해볼까요. 이런 짓도 하고 저런 짓도 하고.”

“안 할 거예요.”

“에이 무슨 상상을 하신 건가요, 클레어 님. 엉큼해.”

“푸흡?! ……당신 진짜!”


황당한 소리를 꺼내는 레이의 말에 저도 모르게 넘어갈 뻔했지만,


“……그런 식으로 제 기운을 북돋아주려고 하는 거군요.”

“역시 클레어 님 답지 않아요. 거기선 좀 더 쉽죠인스럽게 흥분해주셔야죠.”

“쉽죠인이 대체 뭔지는 모르겠지만 레이한테 악의가 없다는 건 잘 알아요.”

“놀—리—는—맛—이—없—어—.”


불만스럽게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레이를 보고 있으니 어쩐지 어깨의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듭니다.


“자, 그럼 오늘도 임시정부와 혁명정부의 절충이었던가요.”

“네. 오전에는 도르 님을 비롯한 임시정부 수뇌부와 회담, 오후에는 아라와 회담이 잡혀 있습니다.”


저는 지금 미묘한 입장에 서 있습니다.

귀족이면서도 민중들의 두터운 지지를 받고 있어서 임시정부와 혁명정부 사이를 중재하며, 양쪽의 타협점을 찾고 있습니다.

이것도 다 레이가 해준 조언에서 시작한 일입니다만 양쪽의 주장은 답이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팽팽하게 맞서는 중입니다.


임시정부는 혁명정부를 단순한 폭도의 무리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일 생각은 없다는 것 마냥, 일각이라도 빨리 해산할 걸 촉구합니다.

반대로 혁명정부도 임시정부를 반드시 타도해야할 적으로만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서 빨리 권력을 이양하라고 임시정부한테 요구하는 중입니다.

이래서야 타협점은 아예 없는 수준입니다.


제가 암담함 상황 속에서 찾아낸 한줄기 빛이나 마찬가지인 유일한 희망은 란스라는 나라의 정치학자가 쓴 학설입니다.

란스에서는 옛날에 혁명이 일어나 귀족들 대다수가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옛 모국을 그리며 한탄했던 그 정치학자는 당시 귀족들이 평민들에게도 참정권을 부여했더라면 귀족들이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고 기술했습니다.

저는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평민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면 일단 혁명정부도 하나의 성과를 거둔 게 되니 자신들의 행동에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건 아니라고 실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임시정부도 한 발 양보하는 형태가 되긴 하지만 이후에도 귀족이라는 신분을 유지해나갈 수 있게 됩니다.

이거라면 양쪽 다 무승부겠죠.

저는 타협점으로 삼을 곳은 이것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그조차도 힘들어 보입니다.


임시정부는 평민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걸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여기고 있고, 혁명정부도 정치체제를 뒤집어엎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벼르고 있습니다.

양측에 실질적인 피해가 나오기 전까지는—— 다시 말해 서로의 피가 흐르지 않으면 깨닫지 못하는 걸까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레이?”


다시 사고의 미로 속을 헤매게 될 것 같았던 저는 문득 레이에게 의견을 물어봤습니다.


“으음—, 그러네요. 양쪽 다 실제로 아픈 꼴을 당해보기 전까진 깨닫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럴 수가…….”

“지금은 둘 다 흥분한 상태입니다. 피해가 발생하면 더욱 충돌이 격화될지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깨닫게 될 겁니다. 아, 이 상태로는 안 되겠구나, 하고요.”

“그래선 너무 늦어요!”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습니다.


“만약에 양측이 무력 충돌을 하는 사태까지 이르게 되면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되는 건 힘없는 사람들—— 즉 여성과 아이들이에요.”


개중에는 마법으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극히 소수입니다.

마법석 없이는 강력한 마법을 쓸 수 없고, 가장 싸구려 마법지팡이조차 평민들에게는 비싼 물건입니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사태를 수습해야.”

“그럼 우리가 더욱 노력할 수밖에 없겠네요.”


그렇게 말하며 레이는 제 등 뒤로 다가와 양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부드럽게 저를 의자에 앉혔습니다.


“저도 누군가가 피를 흘리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해보도록 하죠.”

“저를 옆에서 지탱해 줄 건가요.”

“물론이고말고요. 클레어 님이 하고자 하는 일이 곧 제가 하고자 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방긋 웃는 레이의 표정에 저는 살짝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때 레이는 어쩐지 조금 이상했습니다.

레이는 웃음으로 얼버무렸지만 그녀가 하는 말을 요약하자면 이런 뜻이었습니다.


——내키는 대로 하면 되잖아요.


그건 언제나 한 수 앞을 내다보며 빠르게 손을 쓰던 레이라곤 생각하기 힘든 태도였습니다.

그때 레이는 이미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겁니다.


어리석게도 저는 그런 사실을 조금도 깨닫지 못한 채, 레이를 한 점의 의심도 없이 믿고 있었습니다.



83. 왕국력 2015년 11월 10일


임시정부와 혁명정부 사이를 오가길 몇 주째.

조금도 입장을 양보하려고 들지 않는 두 세력을 끈기 있게 설득하려고 분주했습니다.

레이도 옆에서 저를 세심하게 도와줬습니다.

여태까지 해왔던 일상적인 부분들뿐만 아니라 두 정부를 설득할 재료를 함께 논의하고, 구체적인 작전을 입안하는 등, 고맙기 이를 데 없는 헌신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그날이 찾아오고야 말았습니다.


왕국력 2015년 11월 10일.

데모는 마침내 무장봉기로 변했습니다.

임시정부군의 절반이 혁명정부에 가담했고, 무력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전황은 혁명군 쪽에 유리하다고 신문들이 연이어 보도 중입니다.


“……시간에 맞추지 못했어요.”


학교 창문을 통해 군중이 정부군과 충돌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무력감에 휩싸였습니다.

스스로의 한심함에 이를 꽉 악물었지만 이미 일어난 일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클레어 님은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이렇게 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하지만 제가 좀 더 노력했더라면…….”

“클레어 님은 충분히 노력하셨어요.”

“…….”


레이가 위로해줬지만 제 마음속은 후회로 가득이었습니다.

더 빨리 행동에 나섰다면, 더 좋은 타협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면.

귀족으로서 제가 비호해야 할 평민들이 지금 이러는 동안에도 피 흘리며 쓰러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비극의 히로인 행세를 하는 건 용납할 수 없어요.

저는 귀족.

시대가 이러한 흐름으로 나아가는 걸 선택했다면 이제 제게 남은 선택지는 단 한 가지뿐입니다.


“이렇게 된 이상 이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요. 구시대를 짊어졌던 귀족으로서 깨끗하게 최후를 맞이하겠어요.”


평민들은 귀족을 몰아내겠다고 선택했습니다.

그렇다면 귀족의 숙명은 그 선택에 수긍하는 것.

프랑소와 가문은 귀족의 대표입니다.

그러니 하다못해 귀족과 평민, 양쪽의 희생이 그나마 적은 이때, 귀족의 대표로서 종언을 선언해야겠죠.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한다면 거짓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평민들을 다치게 만들면서까지 이 자리에 매달리겠다는 마음을 품을 수 없었습니다.


저에겐 평민들의 선택을 받아들일 각오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니요, 클레어 님. 클레어 님은 구시대를 규탄하는 쪽에 서주셔야 합니다.”

“……네?”


레이의 갑작스런 말에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구시대를 규탄해……?

제가 의아해하는 걸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레이가 자세를 가다듬었습니다.


“레이, 당신은 무슨 말을 하는 건가요?”

“클레어 님은 새로운 시대 쪽에 서서, 구시대의 종언을 마지막까지 지켜보는 겁니다.”

“무,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저는 프랑소와 가문의 여식. 구시대의 상징인데요?”


레이가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를 했습니다.

농담치고는 하나도 안 웃깁니다.

하지만 레이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해서 지금 저게 장난으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기 힘들었습니다.


“클레어 님. 구시대의 상징은 클레어 님이 아닙니다. 도르 님이에요.”

“같은 말이잖아요?”

“아니요, 다릅니다. 클레어 님은 도르 님을 포함한 구지배층—— 다시 말해 귀족들을 단죄하는 입장에 서 주셨으면 합니다.”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레이가 지금 하는 말의 요점을 깨닫자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거칠어졌습니다.

지금 레이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한마디로—— 귀족을 배신하라고.


“구시대를 이끌었던 자들을 배신하고 저 혼자서 뻔뻔스럽게 살아남으라고 말하는 건가요?! 결단코 사양하겠어요, 그런 건!”


목숨을 초개처럼 내버릴 생각은 없습니다만 저에게는 귀족의 긍지가 있습니다.

그저 목숨을 연명한다 해도, 남은 삶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레이에게 그 점을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레이가 그 다음으로 꺼낸 말은 제가 상상도 하지 못한 사실이었습니다.


“이건 도르 님의 의향이기도 합니다.”

“……네? 자, 잠깐만 기다리세요. ……네? 아버님의 뜻?”


어째서 이 타이밍에 아버님의 이름이 나오는 건가요?

아버님은 사리사욕에 물들어 부패한 귀족이 되고 만 거 아닌가요?


“그렇지만…… 아버님은……. 대, 대체 무슨 말인가요, 레이!”

“이 혁명의 흐름을 만든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도르 님이에요.”


레이의 말에 저는 점점 더 곤혹스러웠습니다.

평민들이 무장봉기를 일으키도록 아버님이 일을 꾸몄다고……?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어요!”

“차근차근 순서대로 말하겠습니다. 긴 이야기가 될 테니 앉아주세요.”


혼란에 빠진 저와는 다르게 레이는 어디까지나 침착했습니다.

레이는 저를 의자에 앉히고서 천천히 『해설』을 시작했습니다.


“클레어 님도 아시다시피 왕국의 정치에는 부패의 조짐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사리사욕만을 추구하고, 하루 종일 권력 투쟁에만 전념했습니다.”

“……네에, 하지만 그게 이거랑 무슨 관계가——.”

“그런 상황에서 이 나라의 앞날을 진지하게 걱정하는 보기 드문 귀족이 있었습니다—— 그게 도르 님입니다.”

“아버님이? 하지만 아버님은 왕실을 업신여기고, 이 나라의 정권을 자기 손에 쥐려고…….”


그 사실은 바로 직전까지도 양측 정부 사이를 바쁘게 오가던 제가 누구보다도 제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버님의 태도는 이 나라의 미래는커녕, 당장 내일조차도 염두에 두지 않는 태도였습니다.


“도르 님은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아 악덕 귀족의 구심점이 된 겁니다. 모든 것은 오늘 이날, 평민들의 손으로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요.”


레이는 아버님의 귀족답지 못한 행동들은 모두 다 위장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레이가 말을 이었습니다.


“옛날에는 도르 님 역시, 이런 귀족들의 현재 상황에 아무런 의문을 품지 않았습니다. 그랬던 도르 님의 생각이 달라진 건 클레어 님의 어머님이신 밀리아 님이 돌아가셨을 때입니다.”

“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때……?”


저에게 있어서도 씻을 수 없는 커다란 상처를 남겼던 그날, 아버님도 무언가를 느끼셨다는 걸까요.


“밀리아 님의 사고는 다른 유력 귀족이 꾸민 일이었습니다. 모살당한 겁니다.”

“그럴 수가……!”

“도르 님은 그날부터 달라지셨습니다. 이대로 괜찮을 리가 없다는 마음을 품으신 겁니다.”


저는 이제야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버님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요.

아버님이야말로 진정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도르 님은 악덕 귀족을 연기하면서 한편으로는 혁명세력을 지원하기까지 했습니다. 기억하고 계신가요? 제가 클레어 님의 메이드가 됐던 날의 일을.”

“……네. 분명 그때 당신이 무언가를 말하자 그 순간부터 아버님의 태도가 달라졌었죠.”

“그때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바인 마누엘, 3월 3일 50만 골드』. 그건 도르 님이 레지스탕스에게 몰래 보내고 있던 금전 지원 내역이었습니다.”


레이의 설명으로는 그건 아버님 말고는 아무도 몰라야 할, 레지스탕스의 재정 담당이자 아라의 남동생인 아바인에게 자금을 댄 내역이었다고 합니다.

레이는 아버님의 계획을 알고 있다고 넌지시 운을 떼서 그걸 방패삼아 아버님을 설득했다나요.


“사람들을 물러가게 한 뒤, 저는 도르 님한테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르 님의 뜻은 훌륭합니다만 클레어 님까지 같이 말려들게 하실 건가요, 라고요.”

“어째서 그런…….”

“도르 님은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클레어 님까지 희생시킬 생각이었습니다. 클레어 님을 마음 깊이 사랑하고 있지만 미래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고 계셨던 겁니다.”


그 선택은 귀족이라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아버님이 저를 희생시킬 생각이었다는 말을 들어도 저는 조금도 아버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귀족으로서 응당 갖춰야 할 자세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도르 님에게 다른 선택지를 제시했습니다. 귀족들이 타도 당하더라도 클레어 님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요. 도르 님은 딸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하고서 제 제안을 채택해 주셨습니다.”



레이는 아버님께 다른 시나리오를 제안했습니다.

제가 구시대의 귀족과 결별하고서 단죄하는 쪽에 선다는 시나리오.


“제가 지금까지 펼쳐온 여러 가지 활동은 모두 그걸 위해서입니다. 클레어 님의 명성을 드높이고, 귀족들과는 거리를 두고서 새로운 시대에서 살아가실 수 있도록.”

“그러면…… 그렇다면 당신은!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서!”


지금까지 계속 제 곁에서 저를 도와줬던 게 모두 다 거짓말이었다는 건가요.

저는 더 이상 레이가 없는 인생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을 신뢰하고 있었는데!


“네. 혁명이 일어나는 것도, 그 결과 도르 님을 비롯한 귀족들이 파멸하는 것도, 그런 일들이 어떻게 해서든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저는…… 당신을 믿고서……!”

“정말 죄송합니다, 클레어 님. 어떤 처분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조용히 눈을 감는 레이의 모습은 너무나도 초연해서 저는 제 안에서 끓어오르던 분노가 임계점을 넘어갔음을 느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크게 손을 들어올려, 격정이 이끄는 대로 그 뺨을 때리려고——.


했지만 저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아버님도 당신도…… 너무 제멋대로예요…….”


레이도 아버님도 저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 거짓말은 저로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거짓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째서 그런 거짓말을 했는가, 그걸 깨닫지 못할 만큼 저는 어리석지 않았습니다.


——모든 건 저를 위해서.


귀족의 시대가 막을 내려도, 제가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그건 바로 딸을 가진 아비로서의 애정이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반려로서의 애정이었습니다.

넘쳐흐른 마음이 뺨을 타고 내려갑니다.


“클레어 님은 이제부터 혁명정부에 합류해 주셔야 합니다. 아라와는 이미 얘기가 되어있습니다.”

“…….”


레이는 제가 이제부터 차례대로 해야 할 일들을 설명했습니다.

훨씬 예전부터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예견하고서 수많은 준비를 해왔던 거겠죠.


“이제 머지않아 왕실이 혁명정부에게 칙명을 내릴 겁니다. 그렇게 되면 역적이 되는 건 귀족들. 클레어 님은 그들을 단죄해 주셔야 합니다.”

“…….”


그런데요, 레이.

당신은 아주 소중한 걸 잊고 있군요?


그 사실이 저로선 참을 수 없이 슬펐습니다.


“클레어 님?”


레이의 말을 등으로 받으며 저는 창문을 향해 다가갔습니다.

밖에선 여전히 평민들이나 양측 정부군이 전투를 벌이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기, 레이. 제가 평민이 된다면 어떤 생활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나요?”


있을 수 없는 가정입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레이에게 물어보고자 했습니다.


“그러네요……. 처음엔 당황할만한 일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바캉스 때 저희 집에서 묵었을 때처럼.”

“그렇겠죠.”


레이를 돌아보지 않은 채,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레이네 집에 갔던 추억은 아직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닐 텐데도 벌써 아주 옛날 일처럼 흐릿했습니다.


“하지만 금방 익숙해지실 거예요. 제가 항상 옆에 붙어서 돌봐드릴 거고요.”

“그래요……. 당신도 함께 생활하는 거네요.”

“그야 당연하죠. 클레어 님을 위해서라면 있는 힘껏 일도 할 겁니다.”

“그렇군요. 그런 것도 필요하게 되겠네요.”


레이가 얘기하는 그런 생활도 분명 나쁘지는 않겠죠.

레이가 옆에서 도와준다면야 어떤 생활을 하든 즐거울 게 틀림없습니다.


“개도 길러보죠.”

“고양이가 좋아요.”


레이와 제가 단둘이서 보내는 오붓한 생활.


“정원 같은 것도 갖고 싶으신가요?”

“화단도 있으면 좋겠네요.”


귀족의 삶과는 다른, 소박하지만 평온한 인생.


“아이는 몇 명이나 낳을까요?”

“못 만들잖아요.”

“그럼 양자라든가.”

“귀여운 여자아이가 두 명 있었으면 좋겠어요.”


레이의 가벼운 말투에 대답하고서 저는 한 박자 침묵한 뒤,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분명 저를 불행하게 만들지 않는 거네요.”


네, 하지만 그건 저로선 손에 넣을 수 없는 꿈입니다.


“——어요.”

“네?”


결의가 담긴 말은 갈라진 채 떨리고 있었습니다.

제대로 듣지 못한 건지 레이가 되물었습니다.


“클레어 님?”

“거절하겠어요, 라고 말했어요.”


저는 뒤를 돌아 레이의 눈을 응시하면서 이번에는 흔들림 없이 딱 잘라 말했습니다.

레이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어쩐지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클레어 님. 더 이상 다른 선택지는 없어요.”

“아니요, 있어요. 귀족의 일원으로서 구시대와 함께 사라지겠다는 선택지가.”


레이, 당신과 아버님의 뜻은 잘 알았어요.

하지만 있죠, 저는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살아오지 않았어요.


“그런……. 무의미해요! 그도 그럴 게, 그런 짓을 해봤자 아무도 기뻐하지 않아!”

“네에, 그렇겠죠.”

“도르 님도…… 그리고 저도, 클레어 님이 계속 살아남아 주셨으면 해서 지금까지——.”

“네에, 그 마음씀씀이에는 감사하고 있어요.”


속마음을 말로서 표현하면 할수록 점점 마음이 차분해지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저는 이렇게나…….


“기다려…… 기다려주세요. 도르 님과 제가 입 다물고 일을 진행했다는 사실에 화를 내고 계신 건가요? 그 점은 사과드릴게요. 하지만 만약 솔직히 말씀드렸다면 클레어 님은——.”

“그런 일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부했겠죠.”


이렇게나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던 거군요.


“아버님도 레이도 진심으로 저를 염려해줬던 거네요. 그건 알고 있어요. 화내고 있다니, 그렇지 않아요.”

“그렇다면, 어째서!”

“그야——.”


레이, 미안해요.


“저는 귀족인걸요.”


레이가 말문을 잇지 못하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귀족이란 유사시에 자신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 사치를 누릴 수 있었던 존재예요. 지금까지 제가 수도 없이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었던 건 그야말로 오늘, 바로 이 때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그런 건 이제 됐다고요!”

“아니요, 제 마지막 책임—— 그건 구시대의 귀족으로서 평민들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일이에요.”


레이.

애매한 동경심이 아닌, 제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


“클레어 님…… 다시 생각해보자고요…… 우리 함께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요…….”

“미안해요, 레이. 이것만큼은 아무리 당신의 부탁이라도 들어줄 수 없어요.”

“제발요…… 저랑 약속하셨잖아요……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겠다고요.”


당신과 함께했던 날들은 정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었어요.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죠. 어쩐지 그립네요.”


하지만——.


“싫어…… 싫어요……. 클레어 님…… 가면 싫어……!”

“미안해요, 레이.”


레이답지 않게 어린애처럼 떼를 쓰는 레이의 뺨에 가만히 손을 올리고서 저는——.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빼앗았습니다.


“약속을 어긴 사과의 뜻으로 첫 키스 정도는 드리겠어요.”


이걸로 이제 여한은 없어요.


“안녕히 헤이. 부디 건강하기를.”


그저 멍하니 서있는 레이를 뒤에 남겨두고서 저는 방을 나왔습니다.


레이.

레이.

사랑하는 사람.


하지만 저는 당신처럼 사랑에 몸을 바칠 수는 없어요.

당신과 같은 삶의 방식은 저로선 불가능해요.

용서해달라고는 말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부디——.


“새로운 시대에서 당신은 살아줘요.”



84. 왕립학교 방어전


※피피 발리에 시점 이야기입니다.


“후문이 돌파당하기 직전입니다!”

“겁먹지 마라! 여기서 막아낸다!”


크글렛 가문의 병사가 가져온 비명 섞인 보고에 로렛타가 일갈했다.

이곳은 왕립학교 후문.

로렛타와 나는 학교를 지키기 위해 이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평민들의 데모는 마침내 무장봉기로 격화됐다.

식칼이나 손도끼 등, 무기가 될 수 있는 것들을 손에 든 평민들이 귀족 거리로 밀고 들어와 여기저기서 약탈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그 흐름은 당연히 왕립학교에도 미쳤다.


정문 앞에는 수천에 달하는 평민들이 모여들었고, 귀족의 요람인 학교로 침입하려드는 중이다.

아마 지금은 로렛타의 아버지—— 크글렛 백작이 직접 임시정부군을 이끌고 대응하고 있겠지.

로렛타는 백작의 명령으로 후문 방어를 맡게 되었다.

나는 로렛타의 보좌역이다.


“피피, 무리해서 나를 따라오지 않아도 괜찮았는데?”


표정에 긴장이 서려 있으면서도 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주는 로렛타는 무척 상냥했지만 지금 내가 바라는 건 그런 말이 아니었다.


“무리하고 있는 건 로렛타잖아? 솔직히 말하라고. 자기 곁에 있어달라고.”

“윽…….”


로렛타가 뺨을 붉게 물들이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음악회 때 이후로 나는 로렛타한테 적극적으로 대시하고 있다.

로렛타의 마음에는 아직도 클레어 님을 향한 연모가 남아 있지만 느낌은 꽤 괜찮았다.

언젠가는 반드시 그녀의 마음을 빼앗아 주겠어.


그러기 위해서라도 이런 곳에서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 로렛타. 멍하니 있지 마. 병사들이 지시를 기다리고 있다고.”

“아, 응. 3반, 전진!”


로렛타의 호령과 함께 크글렛 가문의 병사들이 움직인다.

속으로 제법 멋진걸, 하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니 바로 마음을 다잡았다.


“귀족을 죽여라—!”

“평민에게 자유를—!”


노성과도 같은 평민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귀족들의 세상은 이제 끝나는 걸까.

예전에 유 님이 예언처럼 말한 적이 있는데 바로 지금이 그때라는 생각이 든다.

귀족이 평민들의 손에 무너지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해봤다.

하지만 지금 그 예언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귀족의 지위를 잃는 건 괜찮아. 어차피 발리에 가문은 이미 사라졌으니까.)


발리에 가문은 아샤르 후작과 엮인 사건으로 귀족 작위를 박탈당했다.

처형을 면할 수 있었던 건 클레망을 체포한 공적을 인정받은 덕분이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옛 영지에 있는 유력자에게 몸을 위탁하고 있다.

아버님은 귀족이면서도 영지민들의 두터운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생활이 안정될 때까지 뒷바라지를 해주겠다는 상인이 있었다.

새로운 생활이 궤도에 오를 때까지 나는 크글렛 가문에서 신세를 지게 됐다.


그래서 귀족이라는 신분을 잃는 건 이제 나한테는 그다지 상관없는 일이 되었다.

하지만 로렛타는 귀족을 지키고 있는 군부 최고 책임자의 딸이다.

그녀가 이 혁명이라는 흐름에서 목숨을 잃게 되는 사태만큼은 반드시 피하고 싶다.


(최악의 경우엔 로렛타만 기절시켜서 이 자리를 이탈하는 건 어떨까……?)


아냐, 그건 현실적이지 못해.

전황은 팽팽한 상태다.

지금 로렛타라는 사령탑을 잃게 되면 이 후문은 돌파될 테고,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도 어려워지겠지.


(아~~ 정말이지!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은 거야!)


나는 속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폭도의 숫자는 여전히 늘어나는 중! 안 됩니다! 밀리고 있습니다!”

“큭……!”


로렛타의 표정에 초조함이 떠오른다.

그것도 당연하지 싶었다.


“로렛타 님, 공격마법 사용 허가를!”

“이대로라면 돌파당하는 것도 시간문제입니다!”

“……그럴 순 없어!”


그렇다.

로렛타는 휘하 병사들이 공격마법을 사용하는 걸 금지했다.

공격마법을 쓸 수만 있다면 아직까진 이쪽에도 승기가 있다.

하지만 로렛타는 그걸 허가하지 않았다.


“평민은 지켜야 할 대상이지, 공격 대상이 아니야! 어떻게든 강화마법과 치유마법으로 버텨라!”


모든 건 평민들에게 부상을 입히는 걸 피하기 위해서.

로렛타는 어느새 클레어 님과 같은 생각을 품게 되었다.

어쩌면 여름에 있었던 그 경험이 로렛타를 지금처럼 만든 걸지도 모른다.


“안 됩니다! 후문이 무너집니다!”


그 보고와 동시에 후문이 돌파 당했다.

평민들이 눈사태처럼 안으로 밀고 들어온다.


병사들이 점차 밀려드는 흐름에 삼켜져가고, 이제 칼날은 우리의 턱밑까지 다가왔다.

이제 다 틀린 걸까.


“로렛타 님, 공격마법 허가를!”

“안 돼! 귀족이라면 마지막까지 귀족의 긍지를 관철하도록!”


그렇게 외치는 로렛타의 얼굴은 죽음을 각오한 자의 표정으로 보였다.


그때——.


“멋진 외침입니다.”


지성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주변에 안개와도 같은 기운이 자욱하게 깔렸다.

그 안개는 지향성을 가진 것처럼 평민들을 둘러싸듯 움직였다.

그러자 평민들이 한 사람, 한 사람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재웠을 뿐이에요.”

“크리스토프 님!”


나타난 사람은 크리스토프 님이었다.

마법지팡이를 손에 들고서 마법의 안개를 조작하자 평민들이 차례차례 수마에 이끌려 잠들기 시작한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크리스토프 님!”

“경칭은 이제 붙일 필요 없어요, 로렛타 님. 지금 저는 자작에 불과하니까요.”


아샤르 가문에서 처형당한 사람은 당주인 클레망 뿐이었다.

원래 같으면 일족 전원이 사형을 당했어야 할 죄였겠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샤르 가문의 영향력은 아주 막대했기 때문이다.

레이는 “은행이 망하지 않는 거랑 같은 이유군요” 같은 소리를 했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아샤르 가문은 당주가 교체되고, 작위가 강등되는 걸로 처분이 정해졌다.

크리스토프 님은 지금 아샤르 자작이다.


“게다가…… 아직도 오고 있습니다.”

“!”


크리스토프 님이 마법지팡이를 겨누는 방향에는 지금까지 몰려들던 평민들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모험가……!”


모험가 길드에 소속을 두고서 여러 가지 다양한 의뢰를 수행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모험가라고 부른다.

그들은 대부분이 전투의 스페셜리스트고, 그걸 증명하듯 크리스토프 님의 안개에도 잠든 사람이 없었다.

어떠한 저항 수단을 갖추고 있는 걸로 보였다.


“자, 가자! 자식들아!”

“오오!”


리더로 보이는 사람이 호령하자 열 명이 넘는 모험가가 달려들었다.

머릿수는 그리 많지 않지만 움직임만큼은 방금 전의 평민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연계를 이루고 있었다.

이제 물량으로 압살당할 일은 없어도, 평민들 보다 훨씬 성가신 상대다.


“물러나세요, 크리스토프 님!”

“이곳은 우리한테 맡기십시오!”


그때 달려오는 모험가들 앞을 가로막고 선 사람은 우리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소년 소녀들이었다.


“당신들이야말로 물러나세요. 이곳은 귀족들의 전장입니다.”

“아니요!”

“크리스토프 님께 받은 은혜를 여기서 갚겠어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때 크리스토프 님을 지키려고 나선 사람들은 클레망의 인신매매에서 크리스토프 님이 구출해낸 고아들이었다고 한다.

그 아이들은 구출된 뒤 평민으로 살아갈 수도 있었는데 크리스토프 님의 인품에 반해서 계속 따르겠다고 결심했다나.


“칫…… 꼬맹이들인가…….”


모험가들의 선두에 서 있던 손때 묻은 숏소드를 든 남자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걸음을 멈췄다.

내 기억 속에 있는 남자였다.


“유클레드 때…….”

“또 만났구만. 발리에 아가씨.”

“덤비겠다면 상대해 줄 건데?”

“흐음…… 나도 의뢰라고 한다면야 어지간한 일은 다 받아들이는 편이긴 해. 하지만——.”


남자는 품속에서 뭔가 묵직해 보이는 주머니를 꺼내더니 아까 리더로 보이던 사람을 향해 던졌다.


“어이, 뭐야 이건?”

“그거면 보수의 3배는 되겠지. 위약금이다.”


그러면서 그 남자는 켁, 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웃었다.


“네 녀석, 이미 수령한 의뢰를 내팽개칠 생각이냐?!”

“꼬맹이들을 죽이는 게 의뢰라는 소리는 들은 적 없다, 멍청아! 모험가도 일 정도는 가려 받는다고!”


그 남자뿐만 아니라 다른 모험가들도 관두자, 관둬, 하고서 걸음을 멈췄다.


“저 녀석들은 귀족이라고!”

“나도 알아. 하지만 이 아가씨는 귀족이기는 해도 봐줄만한 귀족이야. 죽은 동료들을 위해 울어줬다고.”

“귀족의 간사한 연기다!”

“연기로 구토를 하는 귀족 아가씨가 있겠냐. 그치?”


남자가 묻자 로렛타는 거북한 기색으로 시선을 피했다.


“물러가 주시는 겁니까?”

“일단은 휴전이다. 우리도 피를 흘리고 싶진 않아.”


크리스토프 님의 질문에 모험가는 그렇게 말하면서 검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솔직히 이 혁명은 『성공』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겠죠.”


이 자리는 어떻게든 수습이 됐지만, 이미 싸움의 형세는 기울었다고 모험가가 말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학교는 혁명정부에 무조건 항복하겠다고 선언했다.

우리 귀족 자제들은 일단 혁명정부의 감시 하에 학교에서 머물게 되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되는 걸까.”

“어떻게든 될 거야. 살아만 있으면.”


불안한 듯이 중얼거리는 로렛타의 손을 힘주어 마주잡아주면서 나는 어떻게든 살아남겠다고 마음속으로 굳게 맹세했다.



85. 각오


“클레어 님은 이쪽에서 기다려 주시죠.”

“그래요…… 고마워요.”


혁명정부 병사들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구 귀족원 의회 제 2청사였습니다.

역사를 가진 오래된 건물이고, 왕국의 국보로 지정된 건축물이기도 합니다.

안내에 따라 건물 안에 있는 방에 들어가자 익숙한 사람이 보였습니다.


“클레어…….”

“아버님!”


아버님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저를 향해 황급히 달려와 저를 안아주셨습니다.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마안하구나.”


가슴에 매달려 울음을 터트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닙니다.


“그러면 두 분은 여기서 대기해주십시오. 용무가 있을 땐 종을 울려주시길.”


병사는 그 말만 하고서 방을 나갔습니다.


원래는 의회 청사로 쓰였던 건물이니만큼 실내 조형은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동안 쓰이지 않았던 건물이라서 곳곳에 먼지가 쌓여 있고, 의자를 비롯한 가구들은 어디서 급히 구해온 건지 싸구려로 보이는 것들입니다.

화려한 실내와 싼 티가 나는 가구들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는 탓에 어수선한 인상을 줍니다.


“네가 여기에 있다는 건 레이가 한 일이 잘 안 됐다는 뜻이겠지?”


아버님은 일부러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방식으로 물었습니다.

저 질문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너는 어디까지 진상을 알고 있느냐는 뜻입니다.


“레이는 마지막까지 아버님과 계획했던 설계대로 하려고 노력했어요. 제가 이곳에 있는 건 제 긍지예요.”

“……바보 같은 녀석.”


제 대답만으로 모든 사정을 깨달은 걸까요. 아버님은 잠시 동안 괴로운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다시 한번 저를 안아주셨습니다.


“나는 네 선택을 귀족으로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고마워요.”

“하지만 아버지로서는 꾸짖을 수밖에 없구나. 너는 좀 더 자유롭게 살아가도 됐을 것을.”


저를 품에 안은 채로 말하는 아버님의 말에서 쓰디쓴 고뇌가 묻어나왔습니다.


“이게 제 삶의 방식이에요, 아버님.”

“너에게 고통스런 삶의 방식을 강요하고 말았어.”

“아니요, 아버님. 저는 귀족으로서의 자신을 납득하고 받아들였어요. 이걸로 충분한 거예요.”


저는 이렇게 된 걸 후회하지 않습니다.

좋은 일들로만 가득한 인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저는 행복했습니다.

유복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경애하는 아버님을 두었고, 좋은 친구도 있었고, 무엇보다——.


(당신과도 만날 수 있었어요.)


레이.

내 사랑.

그녀를 혼자 남겨두게 된다는 게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점입니다.


“오오— 이거 귀족님들은 참 고상하기도 하시지.”


노크도 없이 벌컥 열린 문을 통해 이 자리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명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릴리 추기경…….”

“얼터라고 불러줘. 지금 나는 릴리와는 다른 사람이거든.”


그러면서 릴리 추기경—— 즉, 얼터는 릴리 추기경이라면 결코 짓지 않을 빈정거리는 표정으로 웃었습니다.

얼터는 일전에 검은 가면을 쓰고서 암약했던 나 제국의 자객입니다.

그 정체는 사라스가 마법으로 만들어 낸 릴리 추기경의 또 다른 인격이었습니다.


“얼터, 그런 설명을 할 필요는 없겠죠. 그들은 어차피 곧 죽을 운명에 놓여 있으니까요.”

“사라스…… 네 놈……!”

“도르, 유감입니다. 당신처럼 뛰어난 정치가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되다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아버님이 쏘아 붙이자 사라스는 시원스레 웃어 재끼고서,


“아뇨아뇨, 진심이고말고요. 물론 눈엣가시 같던 사람이 사라져서 속이 시원하다는 것도 한 치의 거짓 없는 진심이지만요.”

“사라스. 너는 자신의 야심을 위해 국민을 팔아넘기려 하고 있어. 그걸 이해하고 있는 건가?”


냉소와 함께 코웃음을 치는 사라스와는 반대로 아버님은 끝까지 한 사람의 정치가로서 진지한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사라스의 악행을 막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계시겠죠.

레이는 혁명에 이르는 길을 닦은 건 아버님이라고 말했지만 나 제국이 혁명의 혼란에 편승해 개입하는 건 계산 밖이었던 모양입니다.


“국민 따위 아무래도 좋아. 저는 제 자신을 위한 정치를 합니다. 바우어 왕실도 나 제국도 제 손바닥 위에서 조종해드리죠.”

“……쓰레기가. 이 순간이 될 때까지 네 녀석의 꼬리를 잡지 못한 게 이 도르 프랑소와 최대의 실수였어.”

“후후후, 어디 좋을 대로 말해보시죠. 어차피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이제 없습니다. 아니면 옆에 있는 딸과 함께 우리한테 덤벼보시겠습니까?”


사라스의 붉은 눈이 저를 희롱하듯이 바라봅니다.


“이게——!”

“넘어가지 마라, 클레어. 싸구려 도발이야. 사라스 혼자라면 어떻게든 되겠지만 저쪽 실험체는 벅찬 상대야.”

“크크큭, 과분한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네.”


아버님의 말에 연극배우 같은 몸짓으로 절을 하는 얼터.


“그래서 사라스. 우리를 어쩔 생각이지. 나 제국에 넘길 건가?”

“아니요, 당신들의 목에 그만한 가치는 없습니다. 당신들은 구시대의 상징으로서 처형대에 서 줘야겠습니다.”


처형대—— 그 단어를 듣고서 저는 이제야 실감과 함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사형당하는 거라고요.


“어라? 왜 그러시죠, 클레어? 설마 이제 와서 죽는 게 두려워지기라도 했나요?”


사라스한테 조롱을 당하는 건 견디기 힘든 일이었지만 사실 그 말대로입니다.

저는 이때가 되자 죽는다는 사실에 공포를 느꼈습니다.

처형이라고 표현한다는 건 편히 죽을 수 있는 방법이 아닌 거겠죠.

잘 해봐야 참수, 운이 나쁘면 화형까지 갈 수도 있을 겁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클지 상상해보면 몸이 떨리는 걸 억누를 수 없었습니다.


“허세를 부려봐야 어차피 계집. 죽는 건 무서운 모양이군. ……그렇군요, 그렇다면 찬스를 드릴까요.”

“찬스…… 라고요?”

“네.”


사라스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습니다.


“얼터처럼 당신도 제가 조종하는 인형이 되도록 하세요. 그러면 살려드리지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너무 어처구니없는 선택지라 저는 격분했습니다.

사라스 같은 인간을 위해 일하라니, 대가로 어떤 좋은 조건을 제시하든 사양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저울에 올려놓게 된 지금, 아주 약간이지만 그 유혹이 달콤하게 들린 것도 사실입니다.

그 사실이 제가 가진 귀족으로서의 자긍심에 아픈 상처를 새겼습니다.


“후후후, 그런가요. 싫으신가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귀족의 고결한 프라이드와 함께 처형대의 이슬로 사라지면 됩니다.”


사라스는 우스워서 견딜 수 없다는 것처럼 웃었습니다.


“…… 취향 한번 고약하네, 아버지도.”


작게 중얼거린 얼터의 한마디에 저는 불현듯이 깨달았습니다.

사라스는 처음부터 우리의 목숨을 살려줄 생각 따위 요만큼도 없었다는 걸요.

그저 원수와 원수의 딸을 조롱하고, 고통받는 표정을 즐기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요.


“보아하니 네 녀석과 말을 섞어봤자 소용없겠군. 어서 여기서 나가도록.”

“어라, 그런 태도를 보여도 되겠습니까? 클레어가 어떤 꼴을 당하게 될지는 제 마음에 달렸는데요?”

“클레어는 내 딸이야. 어떤 꼴을 당하든 이미 각오는 되어 있어.”

“그런 것 치고는 죽음이 두려운 모양입니다만?”

“죽음이 두렵지 않은 인간은 없지. 하지만 귀족은 그 죽음의 의미를 바라보는 존재다.”


아버님의 말에 저는 문득 깨달았습니다.


확실히 죽는 건 두렵습니다.

하지만 제 죽음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죽음이 아니라면?

제가 죽음으로서 평민들은 새로운 시대가 막을 올렸다는 실감을 얻을 수 있겠죠.

바우어에서는 새로운 정치가 시행되고, 평민들은 아마 지금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 평민들 중에는 레이도 있을 거예요.


제가 죽음으로서 레이의 미래가 열리게 된다면.

레이는 유능한 여성입니다.

새로운 시대가 열리면 여기저기서 러브콜을 받겠죠.

레이는 분명 시대의 총아가 될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 떨리던 제 몸이 점차 진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어라라, 오기를 부려도 꼴사나울 뿐이라고요, 레이디?”

“뭐라 말하든 상관없어요. 언젠가는 당신을 쓰러트릴 사람이 나타날 거예요.”


그건 어쩌면 레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레이라면 사라스의 횡포를 저지하고, 릴리 추기경을 구해주지 않을까요.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제 마음속을 어지럽히던 감정들은 조금씩 가라앉았습니다.


“……흥, 재미없군요. 뭐, 됐습니다. 그만 가죠, 얼터.”

“그럼 이만, 두 사람. 섣부른 행동은 생각하지 말라고?”


사라스는 얼터를 데리고 방을 나갔습니다.


“클레어, 정말로 괜찮은 거냐? 너 혼자만이라면 여기를 탈출하는 것도——.”

“괜찮아요, 아버님. 저는 각오를 다졌어요.”


저는 이제 괜찮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리 긴 인생은 아니었지만 최선을 다해 귀족답게 살아왔습니다.

게다가——.


(이제야 어머님께 그날 일을 사과드리러 갈 수 있어요.)


젊은 나이에 명을 다했다는 사실에 화를 내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머님이라면 분명 귀족으로서 내건 이상에 몸을 바치는 걸 칭찬해주실 게 틀림없습니다.


“……그런가. 미안하구나.”


아버님과 다시 한번 서로를 부둥켜안았습니다.


그 후로는 아무 일 없이 며칠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때때로 사라스가 찾아와 귀찮게 굴기는 했지만 아버님도 저도 이렇다 할 반응을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해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고자 애썼습니다.


그런데——.


“왔다! 레이 테일러다!”


그건 제 각오를 뒤흔들고도 남을 사건이었습니다.



86. 갈라진 길


“레이……?”


직접 모습을 눈으로 본 것도 아니고, 그저 그 이름이 귀에 들렸을 뿐인데도 제 마음은 요동쳤습니다.

포기했을 텐데.

결심은 이미 마쳤을 텐데.

레이가 살아갈 새로운 미래를 위해서 제 목숨을 버리겠다고.

저에게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과 레이 앞에 펼쳐져 있는 커다란 미래가 서로 겹쳐질 일은 이제 없을 거라고.


그랬는데——!


(레이가…… 레이가 와줬어!)


매일매일 식사도 제대로 넘기지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는 점도 있겠죠.

밤마다 레이와 함께 했던 행복한 날들이 꿈속에 나왔던 점도 있겠죠.

몸도 마음도 한계에 다다랐던 저는, 저도 모르게 계속 억누르고 있었던 속마음이 밖으로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저는 바로 문을 부수고서 방을 뛰쳐나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 직전에.

저를 보며 자상하게, 하지만 쓸쓸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버님의 표정을 보자 끓어오르던 마음이 단숨에 차갑게 식었습니다.


(제가 여기서 나가 버리면 아버님은 혼자 남게 되고 말아요.)


물론 오히려 그게 아버님이 바라는 일이겠죠.

하지만 저로선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버님 혼자 처형당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습니다.


“아버님도 함께——.”

“그건 불가능해.”


아버님은 제가 하려는 말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말을 끊었습니다.


“어째서인가요?!”

“시대가 바뀌었다는 걸 사람들이 느끼게 해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상징이 필요한 법이야. 구시대가 끝났다는 걸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상징이.”


그 상징이 바로 자신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사랑받고 있구나, 클레어.”


창가에 선 아버님이 밖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님의 목소리에선 뭐라 형용하기 힘든 어조가 느껴졌습니다. 어이없어하는 듯한, 그러면서도 동시에 선망이 담긴 복잡한 어조였습니다.

창가로 다가가자 창문 너머로 보이는 광경은 제가 상상했던 그대로였습니다.


“레이…….”


레이는 오로지 혼자.

아무도 데려오지 않은 채, 마도구로 된 갑주를 전신에 두른 사라스의 사병들을 홀로 상대하고 있었습니다.

레이의 얼굴에는 귀기가 서려 있어서, 쏘아내는 마법들도 평소와는 차원이 다른 위력을 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클레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만?”

“…….”


시선은 여전히 창문 밖의 광경에 둔 채, 아버님이 저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어떤 의도로 묻는 말인지는 잘 알고 있지만 저는 뭐라고도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님은 한숨을 한번 내쉬고서 말을 이었습니다.


“나는 그럴 수 없었지만 사랑을 위해 살아가는 인생이 있어도 괜찮겠지. 구시대를 등에 짊어지고 스러지는 건 나 혼자서도 충분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리자 아버님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표정을 짓고 계셨습니다.


“아버님……?”

“돌이켜보면 나는 너에게 부모다운 일을 해준 적이 없었구나.”

“그렇지 않아요……!”

“아니, 그랬어. 밀리아를 잃은 뒤 오직 귀족정치의 종언만이 나에게 최우선 목표였지.”


아버님이 어떤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도무지 짐작하기 힘들었습니다.

새삼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물론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해봤자 늦었다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저는 아버님을 단 한 번도 원망해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그걸 위해 많은 걸 희생해왔어. 이념, 이상, 돈, 자존심—— 그리고 그 중에는 오직 하나뿐인 사랑하는 딸도 포함되어 있지.”

“그만해주세요, 아버님. 저는 다 이해하고 있어요. 아버님이 주신 사랑을 의심해본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어요.”


아버님은 그만큼 저를 오냐오냐하며 키워주셨습니다.

제가 오만방자한 귀족영애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그렇게 굴 수 있었을 정도로 아버님은 저를 아끼고 사랑해주셨습니다.


“나는 말이다, 클레어. 너를 귀족가의 자식으로서 대해왔지만, 과연 내 딸로서 사랑을 줬는지 자신이 없구나.”

“그럴 수가……!”

“피를 나눈 딸을 자기가 세운 계획을 위해 태연하게 희생시키려 하고 있지. 생판 남인 레이조차도 그런 내 행동을 나무랐는데.”


그건 제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아버님의 힘없는 자책이었습니다.

부모로서 딸에게 충분한 사랑을 베풀었는가, 자신이 세운 계획에 담긴 대의는 과연 딸을 희생할 정도로 훌륭한 것이었나.

그건 아마 오늘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줄곧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었고, 아버님 혼자서 속으로 계속 번민해왔던 고뇌를 담은 말이 분명했습니다.


“……아버님. 잠시 창가에서 떨어져주세요.”

“……클레어?”

“어서요.”

“그, 그래…….”


아버님은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었지만 바로 제 말에 따라주셨습니다.


“…….”


——레이, 와줘서 고마워요.

——죽기 전에 다시 한번 당신의 얼굴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제가 소지한 마법지팡이를 뺏어가지 않았던 건, 이렇게 될 거라는 것조차 사라스의 계산속에 있었기 때문 아닐까요.

그런 생각을 하며 저는 지팡이를 높이 들어 올렸습니다.


“클레어, 무슨 짓을?!”

“빛이여…… 매직 레이!”


프랑소와 가문의 문장에서 뿜어져 나온 네 줄기의 광선은 창문을 깨부수고서 눈 아래 펼쳐진 정원의 지면에 검게 그을린 흔적을 새겼습니다.

그 흔적 앞에서 레이는 넋을 잃고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시선이 이쪽을 향합니다.

깨달은 거겠죠.

제가 여기 있음을.


그리고 제 의지를.


“클레어…….”

“이게 제 선택이에요, 아버님.”


그대로 주저앉아 무릎을 꿇은 레이 옆으로 마나리아 언니가 나타났습니다.

언니가 레이를 품에 안고 도망치는 모습을 시선으로 좇으며 아버님을 향해 말했습니다.


“위대한 바우어 왕국의 재무장관, 도르 프랑소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딸, 클레어 프랑소와는 왕국력 2015년 11월에 생을 마감했다—— 그걸로 충분해요.”


언니와 레이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다음 저는 아버님을 향해 몸을 돌렸습니다.


“아버님은 귀족으로도, 정치가로도, 바우어 역사상 제일가는 분이에요.”

“클레어…….”

“그리고 도르 프랑소와는 부모로서도 더할 나위 없이 깊은 애정을 가진, 제 최고의 아버지예요.”

“……클레어.”


아버님은 저를 꼭 안아주셨습니다.


“귀족으로서 죽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그리고 그 긍지는 아버님과 돌아가신 어머님이 저에게 물려주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에요.”

“알겠다…… 이제 충분해. 잘 알았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전부 전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아버님을 향한 사랑, 귀족으로서의 각오, 그밖에 모든 걸 담아서 저도 아버님을 마주 안았습니다.


“너는 정말로 밀리아의 딸이야.”

“물론이에요. 모든 게 끝나면 함께 어머님께 사과드리러 가요.”


제가 그렇게 말한 순간, 정말로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아버님은 고통스러운 듯이 얼굴을 찌푸린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라? 하고 제가 의아하게 생각했을 땐, 이미 아버님은 원래의 위엄 넘치는 얼굴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제가 잘못 본 걸까요.


“그렇구나…… 밀리아한테 사과해야지.”

“네. 그래도 어머님은 상냥한 분이신걸요. 분명 용서해주실 거예요.”

“……그래, 그렇고말고.”


밑에서는 큰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레이의 습격은 거의 성공하기 직전까지 갔고, 사라스의 사병뿐만 아니라 얼터까지 쓰러트렸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됐습니다.

사라스는 그 사태에 당황했는지, 아버님과 제 처형일을 앞당기겠다고 선언하러 굳이 여기까지 올 정도였습니다.


이제 여한은 없습니다.


그 정도까지 했으니 아무리 레이라도 포기하겠죠.

제 각오는 확실히 전해졌을 터.

언니가 바우어로 와줬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언니라면 저를 잃은 레이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을 게 분명합니다.


이걸로 어떠한 아쉬움도 없이 막을 내릴 수 있어요.


그리고 얼마 후, 그게 커다란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이때 저로선 그 사실을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87. 무대의 뒤1 ~마나리아 스스~


※마나리아 스스 시점 이야기입니다.


바우어 유학을 끝내고 돌아온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지긋지긋한 집안 다툼이었다.

과연 누가 다음 왕이 될 거니, 어떤 파벌에 붙어야 꿀을 빨 수 있니, 하고 있는 귀족 놈들의 머릿속에는 자기들 생각밖에 없고 백성들은 뒷전이었다.


나는 그다지 성실하다고 말하기는 힘든 사람이지만 그래도 일단은 왕족이다.

정치에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왔어도 백성들을 가엾게 여기는 최소한의 애정은 있다.

나보고 귀국한 직후의 스스의 상황에 대해 말해보라고 시킨다면 딱 잘라 말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대로라면 나라가 망하겠어.


위기감을 느낀 나는 어쩔 수 없이 왕위계승 다툼에 다시 참전했다.

내 발로 걸어가고 싶지 않은 길이었지만 이대로라면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다.

나도 왕족 나부랭이라 이런 나에게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 책임을 다하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는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대체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한번 추방당한 몸이라 처음에는 거의 아무런 지지도 얻지 못했다.

경쟁 세력이 원래는 왕실에서 쉬쉬하며 덮어뒀던 내 여자 놀음과 관련된 스캔들까지 외부에 폭로하는 바람에, 이건 역시 힘들지 않을까 싶은 상황들만 계속됐다.

그럼에도 나는 좌절하지 않고서 꿋꿋하게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주창했다.


『마나리아 스스 님이시죠.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그랬던 흐름이 바뀐 건 스스에서 가장 큰 신문사의 취재를 받았을 때였다.

지금까지 그 신문사는 당시 왕위계승 다툼에서 유력후보로 꼽히는 왕자들만을 다루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젊은 기자가 꼭 좀 부탁한다며 취재를 신청한 것이다.


기자의 이름은 베티나 에르미니.

아직까진 쉽게 찾아보기 힘든 젊은 여성 신문기자였다.

검은 테 안경을 쓰고서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을 한 기자가 찾아왔을 땐 약간 걱정이 됐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그럴 여유는 사라졌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당신은 여성의 적인가요?』


베티나는 상대가 왕족인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미덥지 못한 외모로는 상상도 못한 날카로운 말투에, 나는 속으로 그녀의 평가를 크게 바꿔야만 했다.

특정 개인이나 단체를 취재하는 신문기자야 적지 않지만 그녀는 그 중에서도 제대로 된 저널리스트였다.

자신의 눈과 펜을 무기로 진실을 파헤치려 하는 기개를 느낄 수 있었다.


질문은 오래 이어졌다.

여성 스캔들에 관한 건 물론이고, 내가 어떠한 정치를 펼치려고 하는가, 인품은 어떤가, 스스의 미래 청사진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가, 등등. 취재는 다섯 시간 반 동안 계속됐다.

그리고 그 다섯 시간 반 동안 그녀는 약간의 빈틈도 보여주지 않았다.

나는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만 했다.


생각해 보면 누군가한테 나 자신에 대해 이만큼이나 얘기해 본적은 없었던 것 같다.

베티나의 질문 속에는 사적인 부분에 해당되는 질문들도 많았다.

그게 혹시 쓸데없는 호기심에서 비롯된 거였다면 대답할 생각이 없었지만 그녀한테 그럴 의도가 없다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베티나는 그저 순수하게 나라는 인간을 선입견 없이 판단하고자 했다.


『독점 취재 : 마나리아 스스——그 인물과 미래상』


베티나의 기사는 커다란 반향을 불러왔다.

어쩌면 마나리아 스스라는 왕족은 이 순간 처음으로 국민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걸지도 모른다.


기사가 공개된 직후엔 나에 대한 평가가 아직 엇갈리고 있었다.

하지만 점점 주목도가 올라가더니 그때부터 조금씩 내 정책을 평가해주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 후에도 나는 꾸준히 나에 대한 정보를 신문에 풀었고, 동시에 시민들의 의견도 모집했다.

시급을 다투는 급한 의견은 즉각적으로 정책에 반영하기 시작하자, 시민들은 나에게 점차 호의를 품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될 거라 생각했던 건 아니다.

그저 이게 어떤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바랐을 뿐이다.

이런 건 그저 당연한 행동이다.

그런데도 예상보다 훨씬 효과가 좋았다.

왕족으로서 부끄러운 일이지만 스스에선 이런 당연한 행동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으니까.


자신들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왕후귀족들한테 환멸을 느끼고 있었겠지.

나를 향한 지지는 꾸준히 늘어났고, 계속해서 추문만 늘어가는 경쟁자들은 점점 영향력을 잃어갔다.


몇 개월 후, 선왕이 차기 국왕으로 지명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였다.

너무나도 깔끔한 결말이라 솔직히 맥이 빠졌다.

하지만 이건 틀림없는 국가의 선택이었다.

반대세력의 핵심 인물들 중에는 이 나라를 포기하고 다른 나라로 떠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 나라는 그만큼 지쳐있었다.


국가를 등에 짊어진다는 건 무겁게 느껴졌지만 의외로 꽤 보람 있는 일이라는 느낌도 들었다.

나는 아이를 낳아본 경험은 없지만 국정 운영은 자식을 키우는 것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재미있게 느껴졌다.

이렇게 생각하는 걸 남이 들으면 반발할 테니까 공공연히 말한 적은 없지만.


그리고서 한동안 국내의 정치개혁에 집중하던 나에게, 얼마 후 생각지도 못한 소식이 도착했다.


『보고 드립니다! 바우어 왕국에서 화산분화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동맹국으로서 나는 바로 바우어에 보낼 원조 대책을 마련했다.

하지만 바우어 귀족들이 임시정부라는 조직을 세우기에 이르자, 이거 슬슬 위험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족들은 왕족조차 무시하고, 백성을 뒷전으로 둔 채 정치를 시행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걸 앞장서서 이끄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도르라고 한다.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 그의 진의를 가늠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이 사태의 배후에는 나 제국의 그림자가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나는 만에 하나의 사태에 대비해서 군대를 이끌고 달려가기로 했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바우어로 달려온 것까진 좋지만 임시정부도 혁명정부도 스스를 어떤 식으로 대우해야 할지 난감해하는 모양이었다.

혁명정부는 배후에 나 제국을 두고 있으니 당연하다고 쳐도, 도르가 이끄는 임시정부는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도르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했다.


그리고 혁명의 순간과 맞닥뜨렸다.


도르는 혁명정부에 체포되었고, 곧이어 클레어도 투항했다고 한다.

내가 느끼는 위화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뭔가 이상해.』


저 도르가 순순히 오명을 감수하는 것도.

클레어가 그런 아버지를 가만히 보고 있는 것도.

게다가 무엇보다도 레이가 두 사람을 막지 않는 게 가장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신중하게 정보를 모았다.

그리고 마침내 레이가 클레어를 구하러 가는 상황을 포착했다.

레이는 분전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클레어는 레이를 거절했다.

그리고 나는 그때 겨우 깨달았다.


——모든 게 잘 짜인 각본대로였다고.


짐작컨대 시나리오를 쓴 사람은 도르겠지.

어쩌면 레이도 중요한 배역을 맡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도르와 클레어는 지금 이 전개를 자진해서 받아들이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 레이는 그걸 반대했고—— 거절당했다.


『…….』


청사 2층에 있는 깨진 창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레이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넋이 나가 있었다.


『이쪽이다! 얼터 님을 도와라!』

『살려 보내지 마라!』


망설이고 있을 시간은 없어 보인다.

클레어는 레이한테조차 저런 대응을 보여주는 건가.

내가 가봤자 달라질 건 없겠지.

나는 일단 이 자리에서는 물러나는 게 현명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품에 안아든 레이는 깜짝 놀랄 정도로 가벼웠다.

이런 조그만 몸에 대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품고서 채 여기까지 왔을까.

도르도 참 심한 짓을 시키는군.


『…….』


스스군 진영에 있는 내 숙소까지 데려왔지만 레이는 여전히 넋이 나간 상태였다.

그것도 당연하지 싶었다.

레이는 진심으로 클레어를 사랑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그 사랑을 자각하게 만들었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지만 일이 이렇게 되자 안 좋은 쪽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레이가 정신을 차리는 데는 며칠이란 시간이 걸렸다.


『마나리아 님……? 어째서 이곳에?』


레이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지만 눈은 절망으로 물들어 있었다.

레이에게 클레어가 얼마나 커다란 존재였는지 알 수 있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때 나는 약간의 흑심을 품고 있었다.


이대로 레이가 마음이 약해진 틈을 파고들면 그녀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레이는 매력적인 여자다.

클레어를 사이에 두고 사랑의 천칭으로 겨뤘을 때 레이를 좋아한다고 했던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하지만…… 이건 무리겠지.


클레어를 잃은 레이는 더 이상 레이가 아니다.

레이에게 클레어라는 존재는 이미 인격의 일부로 자리 잡고 있을 정도로 둘도 없는 존재였다.

만약 지금 여기서 레이가 약해진 틈을 타 끼어든다고 해보자.

확실히 그럴 경우 레이를 내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내가 볼 수 있는 레이의 모습은 얼빠진 허수아비처럼 변한 그녀겠지.

내가 좋아하는 레이는 클레어를 좋아하고 또 좋아해서 견디질 못하는 레이니까.


——이런이런, 손이 많이 가는구나.


나는 레이를 부추겨 다시 한번 일으켜 세우기로 했다.

내 시도는 마침내 성공했고, 레이는 또 다시 클레어를 탈환하러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죄 많은 아이다.

나를 두 번 씩이나 발판으로 삼다니.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


애초에 나는 왕족.

빠르든 늦든 결국 내가 품은 사랑을 포기해야만 했을 테니까.

그러니까 이걸로 충분해.


바라건대 사랑하는 사람과 귀여운 여동생이 서로 손을 맞잡고 다음 시대를 맞이할 수 있기를.



88. 무대의 뒤 2 ~레네 오르소~


※레네 오르소 시점 이야기입니다.


바우어에서 쫓겨나 아파라치아로 이주하게 된 오빠와 나를 맞이한 건 몹시도 가혹한 현실이었습니다.

오르소 가문은 몰락하기 전부터 가졌던 상계의 연줄로 어떻게든 아파라치아에서도 장사를 시작할 수 있었지만, 오빠와 저는 가문에서 의절당한 몸입니다.

가문에 의지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레네, 조금만 더 힘내보자.』

『응…….』


우리가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마땅히 받을 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가야만 합니다.

오빠와 저는 어떻게든 사정사정해서 어떤 여관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게 주인인 남성은 까다로운 성미를 가졌지만 그러면서 동시에 상냥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빠와 저는 의탁할 곳 없는 우리를 받아준 그 사람을 아마 평생 잊지 못하겠죠.


여관에서 오빠는 접객과 사무작업을, 그리고 저는 요리를 맡았습니다.

오빠는 원래부터 온화한 성격인데다 붙임성도 좋아서 금방 접객에 익숙해졌습니다.

저 또한 매일 최선을 다해 일을 했습니다.


『……소개장을 써주지.』


얼마 후 여관 주인은 다음 일자리를 소개해줬습니다.

원래 목돈이 모일 때까지만 여기서 일하기로 계약했던 거라서, 다음 일자리까지 소개받을 수 있었던 건 크나큰 행운이었습니다.

게다가 소개받은 직장은 아파라치아 내에서 유명한 고급 레스토랑입니다.

저는 이곳이 승부를 걸 곳이라고 느꼈습니다.


새로운 직장으로 옮기고서 얼마 동안은 얌전히 잡무를 맡아 일했습니다.

먼저 가게가 어떻게 돌아가고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는지부터 알아야 했습니다.

게다가 그건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저는 어떤 야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 레스토랑은 한 달에 한 번 전 직원이 독자적으로 고안한 요리를 겨루는 품평회를 개최합니다.

제가 노리는 건 그거였습니다.

저는 레이 짱한테 받은 레시피를 여기서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놀라운 맛이야……!』

『이런 요리는 먹어본 적 없어!』


품평회에서 제가 만든 건 마요네즈로 볶은 새우와 브로콜리 요리였습니다.


아직 바우어에서도 블루메 말고는 쓰는 곳이 없는 마요네즈를 쓴 요리는 품평회에서 아주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제 요리는 바로 레스토랑 정식 메뉴로 채택됐고, 저도 주방에서 중요한 부분을 담당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믿기 힘들 정도로 연이어 행운이 잇따랐습니다.


새우와 브로콜리 마요네즈 볶음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인기 메뉴가 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레스토랑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손님들 중에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에드거 씨라고 하는 그 분은 수준 높은 미식가이기도 해서 언젠가는 자기가 꿈꾸는 레스토랑을 개업하고 싶다는 꿈을 품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는 에드거 씨한테서 자기가 자금을 출자할 테니 가게를 가져볼 생각이 없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너무나 달콤한 제안이라서 처음에는 사기가 아닐까 의심했습니다.

오빠는 사무 작업을 배우면서 아파라치아 법률도 같이 공부했기 때문에 에드거 씨에 대해 자세히 조사해봤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파라치아에서는 이미 유명한 미식가였고, 가게를 열어볼 생각 없냐는 제안도 비단 우리한테만 한 건 아니었습니다.

에드거 씨의 출자를 받아 독립한 유명 레스토랑은 이미 한둘이 아니었던 겁니다.

오빠와 저는 에드거 씨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레네.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구나.』

『네, 오빠.』


가게 이름은 『플라텔』이라고 지었습니다.

옛 바우어 말로 『남매』라는 뜻입니다.

『연인』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를 붙이는 것도 고려해봤지만, 이 이름엔 자숙의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저지른 죄를 잊지 말자, 그리고 그걸 이겨낼 수 있기를—— 그런 소원을 담아 이름을 붙였습니다.


레이 짱이 준 레시피를 활용한 플라텔은 금방 유명 레스토랑이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나 인기를 얻은 건 디저트로 제공되는 크렘 브륄레였습니다.

이 레시피에는 레이 짱과 클레어 님과의 추억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그런 소중한 요리가 플라텔의 명성을 높여줬다는 사실에서 운명과도 같은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크렘 브륄레와 함께 매상에 크게 공헌해준 건 오빠가 고안한 마력석을 쓴 조리도구였습니다.

이것도 바우어에 있을 때 레이 짱과 나눈 대화 속에서 나온 아이디어라고 합니다.

이 마도구 덕분에 적은 인원으로도 대량생산을 할 수 있게 돼서, 다른 가게에 크렘 브륄레를 팔거나, 소매상에 위탁 판매를 맡기는 등 판로를 확대해 나갔습니다.

그러면서 마도구로 된 조리도구도 같이 상품화했습니다.

오빠도 톡톡한 활약을 해줬습니다.


이리하여 플라텔이 안정적인 궤도에 오르게 된지도 한 달째.

저와 오빠는 지금 바우어에 있습니다.

삿살 화산의 분화와 그로 인한 국내의 불온한 움직임에 대한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추방처분을 받았으니 원래대로라면 우리는 바우어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에게 혁명정부라고 이름을 댄 조직한테서 출자자를 모집하는 요청이 왔습니다.

바우어에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제가 출자를 승낙하자, 관련 계약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바우어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이건…….』

『심해…….』


오랜만에 본 왕도는 기억속의 아름다운 거리 풍경과는 크게 달라진 상황이었습니다.

분화 파편에 직격당한 걸로 보이는 무너진 건물들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보기 괴로웠던 건 생기를 느낄 수 없는 사람들의 표정이었습니다.

저는 혁명정부가 처음에 요청했던 것보다 더 많은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도저히 보고 넘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초에는 제 사비에서 자금을 출자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빠는 저를 만류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건 로세이유 폐하의 온정 덕이야. 폐하는 돌아가셨지만 나도 같이 은혜를 갚고 싶어.』


그리하여 플라텔 차원에서 원조를 시행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이 결정은 전혀 예상 밖의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먼저 혁명정부는 우리를 대규모 출자자로서 우대해주게 되었습니다.

그거 자체는 딱히 의외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은 혁명정부가 자신들의 활동 내용을 상세하게 보고해주게 된 거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보고 속에서 그걸 보고 말았습니다.


——프랑소와 공작과 그 딸을 체포.


그걸 본 순간 저는 기절할 뻔했습니다.

혁명정부는 귀족정치를 타파하려고 합니다.

이대로라면 클레어 님의 목숨이 위험합니다.


투자를 철회하는 거야 쉬운 일이지만 이때 혁명정부는 이미 플라텔의 자금 출자 없이도 운영할 수 있을 만큼 자금을 확보해둔 걸로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이대로 혁명정부 내에 머무르면서 움직임을 낱낱이 감시하는 편이 낫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속이 바짝바짝 마르는 시간이 계속됐습니다.

클레어 님이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르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채, 그저 사태의 추이를 지켜봐야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마나리아 님한테서 편지가 도착한 게 바로 오늘 아침의 일입니다.


“레이 짱!”

“오랜만이야, 레네. 그리고 미안해.”


레이 짱은 오랜만에 재회하자마자 저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습니다.

레이는 지금까지 계속 속내를 숨기고 있었던 것, 클레어 님을 막지 못했던 걸 사과했습니다.


“레이 짱조차 어쩔 수 없었다면 누구든 불가능했을 거야.”

“하지만…….”

“게다가 아직 포기하지 않았지?”

“……응.”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레이 짱의 표정에는 결의가 서려있었습니다.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클레어 님을 되찾겠다는—— 그 결의가.


“그럼 나도 돕게 해줄래? 함께 클레어 님을 되찾으러 가자.”

“고마워, 레네.”


이리하여 오빠와 저는 플레텔의 이름으로 혁명정부에 협력하는 동시에, 개인적으로는 레이 짱의 클레어 님 구출작전에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클레어 님…….”


지금도 누구보다 경애하는 영원한 제 주인.

클레어 님이 어떤 마음으로 혁명에 목숨을 버리려고 하는지는 금방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계속 살아주시길 원해요.”


한때 배신했던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은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게 제 솔직한 바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자. 할 수 있지? 레네.”

“응!”


저는 혼자가 아닙니다.

레이 짱도 마나리아 님도—— 그리고 오빠도 있습니다.


“기다려주세요, 클레어 님.”


레이 짱이 품은 결의와 똑같은 다짐을 가슴에 품고서 저는 『그날』만을 기다렸습니다.



89. 무대의 뒤 3 ~미샤 유르~


※미샤 유르 시점 이야기입니다.


세 왕자님들 중에서 혁명의 파도에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건 틀림없이 유 님이었다고 생각한다.

유 님은 수확제 때 사건으로 왕위계승권을 포기했다.

그 때문에 국내 정치가 임시정부와 혁명정부로 갈라진 후에도 양측 세력과 거리를 두는 입장을 유지했다.


『클레어가 움직임을 개시한 모양이야. 나도 거기에 협력할까 해.』


클레어 님——그리고 아마 레이도——이 독자적으로 배급을 실시하겠다는 말을 꺼냈을 때, 솔직한 내 마음으론 유 님을 말려들게 하지 말아줬으면 싶었다.

지금까지 어쩔 수 없이 원하지 않는 성별로 살아와야 했던 유 님이 간신히 평온한 생활을 보낼 수 있게 됐다.

그러니 이제는 가만히 내버려둬 달라고 생각하는 게 꼭 내 억지라곤 볼 수 없겠지.


하지만 그런 내 속마음을 유 님이 꿰뚫어본 것처럼 웃었다.


『미샤, 그런 표정 짓지 말아줘. 왕위계승권은 포기했지만 나는 아직 백성을 위해 살아가는 걸 포기한 게 아니니까.』


유 님은 이게 자신이 바라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가끔 종잡을 수 없는 언동을 보일 때가 많은 분이지만, 이런 걸 보면 확실히 어렸을 때부터 제왕학을 배운 분이구나 싶었다.


배급 자체는 금방 순조롭게 체계가 잡혔다.

예전부터 교회는 겨울 기간에는 식량 구호를 실시하고 있었던 터라, 배급에는 도가 터있었다.

문제는 식량 배급을 위한 돈이었는데 어디서 조달한 건지는 몰라도 클레어 님과 레이가 넉넉하게 자금을 보내준 덕분에 그 점도 걱정할 게 없었다.


하지만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태는 점차 악화됐다.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정부군의 절반이 혁명정부군에 합류했고, 두 세력은 격렬한 충돌을 벌였다.

당연히 거리의 치안은 악화일로를 걸었다.

지금까지 양측 정부가 시행하던 배급이 뒷전으로 밀리자, 곤궁에 빠진 사람들이 우리가 실시하는 배급에 몰려들었다.

솔직히 나는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는 우리도 배급을 중지하자고 제안했지만 유 님은 딱 잘라 거절했다.


『지금 가장 고통 받는 사람은 두 정부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힘없는 일반 시민들이야.』


유 님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배급을 이어가야한다고 주장했다.

나도 한때 귀족이었으니까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유 님의 생각은 나나 귀족들의 사고를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왕족이라는 걸까.


혁명이 이대로 격화될 경우 시민들의 칼날은 귀족에서 끝나지 않고 왕족한테까지 미치게 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유 님은 그런 가능성은 털끝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건 세인 님에게도 적용되는 말이었다.

세인 님은 혁명정부가 정신적 지주로 떠받드는 상황에도 무덤덤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주 내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들었다.

아직은 안부를 알 수 없지만 로드 님도 여기 계셨다면 분명 같은 행동을 했겠지.

백성을 위해서 살아가려는 세 왕자님들의 모습을 보며, 나도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자문을 해볼 필요성을 느꼈다.


얼마 뒤, 클레어 님한테서 오던 자금 지원이 끊겼다.

레이도 연락이 되지 않는다.

자금이 없으면 배급을 할 수 없다.

이대로 끝인가 싶었을 때 마나리아 님과 레네가 나타났다.


『잘 버텨주었어. 이제부터는 나도 힘을 보탤게.』

『미샤 님, 미력하지만 저도 돕게 해주세요.』


마나리아 님이 스스에서 가져와준 물자와, 어디서 돈을 벌었나 싶을 정도로 레네가 풍부한 자금을 지원한 덕에 배급은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게다가——.


『여어, 아주 살짝 늦어버렸어.』


만신창이라고 표현해야 할 모습이지만, 언제나처럼 믿음직스러운 환한 웃음을 지으며 로드 님이 합류했다.

로드 님은 역시나 분화에 말려들었다고 하는데,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한쪽 팔을 잃은 상태였다.

당장 안정을 취해야 할 몸일 텐데, 산기슭 마을의 헌신적 가호와 왕족으로서 품고 있는 강렬한 자부심이 로드 님의 몸을 움직여주고 있었다.


이윽고 레이까지 합류하자, 이제는 클레어 님만 돌아와 주면 옛날 학교기사단 멤버들이 집결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익숙한 멤버들이 모였다.


『양 세력의 군대는 나한테 맡겨. 흥분한 머리를 식혀주지.』

『사라스의 죄를 폭로하는 건 나한테 맡겨줘. 레이, 도르의 공적까지 합쳐서 정리해줄래?』

『알겠습니다.』

『얼터라는 녀석을 막는 건 내가 해볼까. 보아하니 어떤 마법에 씐 것 같으니까 스펠 브레이커로 해제하겠어.』


혁명정부가 예고한 공개처형 일자 전날, 우리는 처형을 막기 위해 의견을 나눴다.

누구 하나 빠짐없이 클레어 님과 도르 님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이다.

모두가 두 사람을 구하려고 하는 이유엔 개개인의 호의만 있는 게 아니다.

물론 여기 모인 사람들은 누구나 클레어 님과 레이한테 신세를 졌다.

하지만 클레어 님과 도르 님 같은 사람은 귀족정치가 끝나고, 평민들의 세상이 열린 뒤에도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직접 돕지는 못해. 하지만 지켜보고 있겠어.


발신인을 알 수 없는 전언이 도착했다.

세인 님도 이곳에 계시진 않지만 함께 싸우고 있다.


준비는 갖춰졌다.

이제는 내일을 기다릴 뿐이다.


◆◇◆◇◆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는 종종 같이 낮잠을 잤었지.”

“너는 좀처럼 일어나질 않아서 엄청 고생이었어.”


밤.

우리는 스스군 진영에 머무르고 있었다.

침상이 부족했기 때문에 나는 레이와 한 침대에서 같이 자는 중이다.


“레이.”

“응?”

“혹시 불안하려나 싶어서.”


어쩐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레이한테 물었다.

얘기를 나누는 걸로 해소되는 불안도 있는 법이니까.


“그러게. 역시 불안하기는 해.”

“그래…….”

“하지만 지금 가장 고민하는 건 어떻게 해야 클레어 님의 결심을 뒤집을 수 있을까 하는 점이야.”

“확실히 꽤 어려워 보이네.”


클레어 님은 달라졌다.

학교에서 오랜만에 다시 만났을 무렵의 클레어 님은 판에 박힌 오만불손한 귀족이었다.

하지만 지금 클레어 님은 품격을 갖춘, 내가 도르 님을 통해 본 이상적 귀족의 모습이다.

그런 클레어 님이 자긍심과 의무감을 품고서 죽음을 받아들이려 하고 있다.

그 마음을 돌려놓는 건 이만저만 힘든 일이 아니겠지.


“어리광을 토해내 봐라—— 마나리아 님은 그렇게 말했지만…….”

“마나리아 님이 그런 말을?”

“응. 사실은 나,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


그렇게 말하며 레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겠지. 여태까지도 너는 클레어 님한테 이것저것 어리광을 부려왔잖아.”

“그치? 그런데 마나리아 님한테 똑같이 말했더니 그거랑은 다르다고 했거든.”

“흠…….”


무슨 뜻일까.

레이는 겉치레로 속마음을 숨기는 타입이 아니다.

물론 이번에 도르 님과 짰던 계획처럼 필요에 따라선 속내를 숨길 줄 아는 사람이긴 하다.

하지만 연인에게 자기 진심을 말하지 못하는 타입과는 정반대다.

레이는 틈만 나면 클레어 님한테 사랑을 속삭였다고 생각한다.


아, 그래도——.


“레이. 너는 맷집이 좀 지나치게 강하다고 생각해.”

“어?”

“그건 아마 전생까지 포함해서 네가 쌓아온 경험들이 너를 그렇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네가 잔뜩 흐트러진 모습을 거의 본 적 없어.”


그리고 그건 클레어 님도 마찬가지일 거야.


“사랑이란 좀 더 꼴사나운 거 아닐까.”

“……그 말은?”

“너랑 클레어 님이 유 님한테 배급에 협력해달라고 요청하러 왔을 때. 나는 속으로 유 님을 좀 내버려뒀으면 좋겠다, 아예 유 님이 요청을 거절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오옷, 대담한 고백.”

“장난치지 말고.”


내가 꾸짖자, 레이는 머쓱한 기색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 뒷말을 재촉했다.


“레이는 항상 굉장히 여유 있어 보여.”

“어? 전혀 그렇지 않은데.”

“그래, 사실은 그렇지 않겠지. 하지만 우리들이 보기엔 그렇게 보여. 클레어 님이 혁명에서 목숨을 버리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도, 한편으론 레이 너라면 혼자 남더라도 분명 괜찮을 거라는 생각도 있지 않았을까.”

“…….”


내가 그렇게 말하자 레이는 침묵에 잠겼다.


“레이?”

“그런 생각은 못 해봤어.”

“뭐?”

“아, 아냐. 주변 사람들이 나를 보고 그렇게 느낄 거라고는 상상해본 적 없었으니까.”


이거 참 난처하네, 라며 레이는 뺨을 긁적였다.


“혹시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아니야, 굉장히 참고가 됐어. 역시 미샤, 똑똑한 친구는 두고 볼 일이네.”

“까불긴.”

“우히히.”


장난스러운 레이의 모습을 보고서, 아 얘는 이제 괜찮겠구나 싶었다.


“자, 빨리 자자. 내일은 일찍 일어나야 해.”

“응. 잘 자, 미샤. 고마워.”

“별 말을. 잘 자.”


◆◇◆◇◆


그리고 공개처형일 아침.


“준비는 됐니? 레이?”

“네. 클레어 님에게 이번에야 말로 확실히 깨닫게 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얼마나 한심천만한 사람인지.”

“뭐야 그게.”


마나리아 님의 물음에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레이의 말을 들은 로드 님이 웃었다.

유 님과 나는 물론이고, 레네와 램버트도 함께다.


“아무튼 지켜봐 주세요. 사로잡힌 공주님을 화려하진 않고 꼴사납게 구출해낼 테니까요.”

“레이 짱,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어.”


짐짓 밝은 척 하는 레이는 완벽하게 평소 컨디션이었다.

이 독특한 질주감은 익히 겪어본 적이 있다.

학교에 막 입학했을 무렵, 클레어 님이 상대해주는 게 좋아서 일부러 괴롭힘 당하러 간다고 말했을 때의 레이다.

그때는 대체 얘가 어떻게 된 걸까 걱정했지만, 지금 내가 해줄 말은 그때와 정반대다.


“너 다운 말이네. 잘 다녀오도록 해.”



90. 모여드는 사람들


“지금부터 인민재판을 시작한다!”


사라스가 마치 배우라도 된 것 같은 말투로 재판 개정을 소리 높여 선언했습니다.

저와 아버님은 예복으로 갈아입고서 손은 등 뒤로 돌려 밧줄로 묶여 있는 상태입니다.

누더기가 아닌 예복으로 갈아입힌 건 귀족으로서 평민들의 적대감을 한 데 모으기 위해서겠죠.


“이곳에 있는 도르 프랑소와, 그리고 클레어 프랑소와는 귀족이라는 신분을 내세워서 인민을 착취해왔다!”


사라스는 마치 자신은 조금도 꿀릴 것 없는 떳떳한 사람인 것처럼 말했습니다.

평민들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수 있도록 목숨을 버리겠다는 각오야 예전에 마쳤지만, 그 새로운 시대의 수장이 이런 남자라는 사실만큼은 분하고 분해서 참기 힘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왕실을 업신여기고, 국가를 자신의 사리사욕으로 움직였다! 그건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행위다!”


사라스의 선동에 평민들한테서 노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저는 그런 군중들을 박정하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귀족들이 평민들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당연히 이런 반응이 나올 거라고 각오하고 있었으니까요.


재판이 이어집니다.

사라스는 아버님과 저한테 걸려있는 혐의를 차례차례 읽은 후, 모든 혐의가 유죄라고 단언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뭔가 반론할 말이 있느냐고 아버님을 향해 물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다. 이미 왕국에 바친 몸. 왕국이 멸망한다고 한다면 내 한 몸도 왕국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지.”


아버님은 마지막까지 자신이 맡은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만약 역사서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면 그건 분명 지독한 오명일 것입니다.

아버님 같은 애국자가 희대의 악당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설움이 복받쳐 올라왔습니다.


“죄인은 죄를 인정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처형을 시작한다!”


사라스의 신호에 병사들이 들어왔습니다.

마침내 이 순간이 왔습니다.


긴 듯도 짧은 듯도 했던 인생이었습니다.

좋았던 일들도 나쁜 일들도 이제는 다 추억입니다.

즐거웠던 날들만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있습니까?”


저를 향해 검을 내려치려던 사형 집행인이 물었습니다.


“아니요. 제 인생에 후회는 없어요. 자, 마무리를 지으세요.”

“……잘 가시길.”


집행인이 검을 높이 치켜드는 기척이 느껴집니다.

저는 눈을 감고서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마음속으로 읊조렸습니다.


——안녕히, 레이.


그때——.


“그 재판, 이의 있소!”


이곳에 있을 리 없는 목소리가.

들릴 리 없는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습니다.


“?!”


저는 퍼뜩 놀라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곳에는 낑낑대며 힘들게 목책을 넘고 있는 작은 체구를 가진 여성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틀림없습니다.

저건 레이입니다.


“위병들, 당장 쫓아내세요.”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무시하고 처형을 강행하려는 사라스를 한 남성이 나서서 제지했습니다.


“저 자는 혁명정부의 유력한 출자자입니다. 함부로 손대는 건 허락할 수 없어요.”

“하지만 말이죠, 램버트…….”


저는 전혀 깨닫지 못했지만 그 남성은 왕국에서 추방됐을 터인 램버트였습니다.

분위기가 어찌나 달라졌는지 깜짝 놀랐습니다.

겉모습이야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마치 커다란 나무를 연상시키는 듬직한 품격이 느껴집니다.

어째서 이곳에, 하고 당혹스러워하는 동안에도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착착 진행됩니다.


“이 재판에는 이의가 있습니다. 인민을 부당하게 착취하고 국난을 초래한 진짜 범인은 따로 있습니다!”


레이가 목소리를 드높였습니다.

다시는 들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방울처럼 맑고 청아한 목소리를 들으니, 제 가슴이 꾹 죄어드는 것 같았습니다.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프랑소와 공작가 말고 누가 그런 죄를 저질렀다고 주장하는 거죠?”

“그걸 지금부터 밝히겠습니다. ……레네!”

“네.”


레이의 말에 대답하며 나타난 사람은 놀랍게도 레네였습니다.

어떻게?

레이도 그렇고, 램버트와 레네도 그렇고, 여기 있을 리 없는 사람들이 차례차례 모습을 나타냅니다.


“도르 프랑소와 님은 국가의 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애국자입니다.”


그 말과 함께 레네는 아버님이 지금까지 해왔던 정치활동과 혁명정부에 보낸 지원 내용을 상세하게 말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클레어 님과 레이 테일러, 그리고 릴리 추기경이 실시한 부정 귀족 단속에 대해서도, 그 활동 뒤에는 도르 님의 지원과 지시가 있었습니다.”


당당한 태도와 또박또박한 어조는 마치 제가 아는 레네가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떨어져 있던 몇 달 사이에 레네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자금 제공에 이르러선 XX라는 이름으로 레지스탕스 결성 초기부터 지원을 시작했습니다.”


아뇨, 하지만 지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문제는 어째서 레네가 여기에 있는 건가, 그리고 뭘 하려고 여기에 왔는가, 입니다.

너무나 갑작스럽고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전개가 빨라서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도르 님이야말로 이 나라가 나아갈 길을 진심으로 걱정했던 애국자입니다.”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그렇다고 해도 그들이 임시정부를 세워 왕권을 업신여겼다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 아닙니까!”

“사라스, 네가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깨끗한 알토의 미성이 사라스의 궤변을 깔끔하게 차단했습니다.


“유 님, 어째서 당신이 여기에…….”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사라스. 진짜 죄인이여.”


유 님의 발언에 군중이 술렁입니다.


“죄인? 사라스 님이?”

“역시 유 님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신 건가.”

“하지만 도무지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데——.”


군중들은 몹시 곤혹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유 님의 목소리만이 신기하게도 웅성임 사이사이를 누비는 것처럼 울려 퍼졌습니다.

제 착각이 아니라면 이건 미샤의 솜씨입니다.

미샤도 함께 여기에 와준 걸까요.


“이 자—— 사라스 릴리움이야말로 이 나라의 진정한 적이다. 그는 나 제국과 내통해서 이 나라를 자신의 손에 넣으려고 하고 있다!”


유 님의 규탄이 사라스를 날카롭게 꿰뚫었습니다.

군중 사이로 술렁임이 퍼져나갑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유 님. 역시 당신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신 모양입니다. 부디 마음을 가라앉히고 수도원으로 돌아가시지요.”

“이미 조사는 다 마쳐놨거든. ……레이.”

“네.”


유 님의 목소리에 대답하며 레이가 품속에서 카드처럼 생긴 물건을 꺼냈습니다.


“여기에는 사라스가 제국과 나눈 밀약들이 전부 기록되어있습니다! 여러분! 사라스에게 속아서는 안 됩니다!”


음량을 최대로 높여서 재생된 마도구가 미샤의 풍마법을 타고 증폭되자 사라스의 죄가 낱낱이 드러났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군요.”


사라스는 품속에서 피리처럼 생긴 걸 꺼내들더니 힘껏 불었습니다.

그러자 커다란 소란에도 지지 않을 정도로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면서 그 소리에 호응하듯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아마도 사라스의 사병이겠죠.


“제압하세요.”


사라스가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직후.


“그렇게 멋대로 굴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무시무시한 목소리와 함께 사라스의 병사들이 폭발에 가로막혔습니다.


“조금 늦어버렸구나. 하지만 히어로는 원래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잖아?”


남성미를 물씬 풍기며 씨익 웃은 사람은 행방불명이었던 로드 님이었습니다.

로드 님의 오른팔은 텅 비어 있었지만, 그럼에도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자의 품격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어이, 사라스. 쓸데없는 저항은 그만둬라. 너의 사병들 대부분은 이미 나에게 항복했어. 관록의 차이라는 거지.”

“으윽……. 제대로 죽지도 못한 주제에 방해하려는 겁니까…….”


사라스는 증오가 가득 담긴 눈으로 로드 님을 노려보았지만 로드 님은 콧방귀를 끼며 웃었습니다.


“아직입니다! 아직 저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릴리!”

“아…… 결국 이렇게 되네.”


재판소 그늘로부터 불쑥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단검을 허리에 찬 얼터였습니다.

가죽으로 된 검은 경장갑을 몸에 두르고, 그 위에 검은 망토를 걸쳐 입고 있었습니다.


“도르와 클레어, 그리고 왕자들을 죽여라! 저 녀석들만 없으면 뒷일은 어떻게든 돼!”

“아주 쉽게도 말하네—. 뭐어, 하기야 할 거지만—.”


진저리난다는 듯이 말하면서도 얼터는 단검을 뽑았습니다.

엷은 먹색 칼날 끝은 독액으로 번들거렸습니다.

얼터의 실력은 얕볼 수 없습니다.

혼란에 빠진 전황 속에서라면 설마—— 하는 불안을 느끼고 있었을 때 씩씩하게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여자애한테 이런 짓을 시키다니……. 부끄러운 줄 알라고, 사라스. 스펠 브레이크!”


얼터 앞을 가로막은 사람은 마나리아 언니였습니다.


“그만둬, 『너』는 나오지 마! 이 몸은 내 것이다!”


그 고통스러운 목소리는 얼터와 릴리 추기경이 몸의 주도권을 두고 다투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릴리 님, 제발 돌아와 주세요!”

“레이…… 씨……“그만 둬어어어!””


얼터는 나이프를 마구잡이로 휘두르면서 레이를 향해 육박했습니다.

위험천만한 상황에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을 뻔했는데, 레이는 오히려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더니 릴리 추기경의 몸을 끌어안았습니다.

그러자 릴리 추기경의 몸이 크게 한번 경련하더니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무너져 내렸습니다.


“릴리, 힘냈어요…….”


마지막으로 그 말만 남기고서 릴리 추기경은 의식을 잃었습니다.


“릴리 님도 당신을 포기했습니다. 이걸로 끝입니다, 사라스!”

“으으……. 네놈…… 네노옴……!”


레이가 사라스를 향해 마법지팡이를 들이밀었습니다.


“레이 테일러—! 내 눈을 보도록!”

“?!”


사라스는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레이한테 암시를 걸어 얼터처럼 조종하려는 속셈이었습니다.


“후하하, 너를 제 2의 릴리로——.”

“가만히 놔둘 리가 없잖아.”


목소리의 주인은 언니였습니다.

보아하니 레이도 금방 정신을 차린 모양입니다.


“이 내가 한번 본 마법을 해제하는데 두 번이나 실패할 리가 없지. 얕보지 말라고.”


그러면서 언니도 사라스를 향해 마법지팡이 끝을 들이밀었습니다.


“이제는 정말로 끝이야. 사라스 릴리움.”

“~~~!”


이제는 사라스가 저지를 죗값을 치러야 할 때입니다.

그는 방금 전까지 자기 부하였던 임시정부 병사들한테 체포되었습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결국 누가 나쁜 녀석인 거지?”

“우리는 누구를 처형해야 하는데?”


군중들 사이로 동요가 점차 확산됐습니다.

처음에는 작았던 웅성거림은 시간이 갈수록 점차 커지더니 이윽고 천둥소리처럼 시끄러워졌습니다.


“다들 조용———!!!”


그때 군중들의 웅성임을 뛰어넘는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집니다.


“과연 그렇군. 사라스는 확실히 악당이었던 모양이야. 그런데 말이지?”


목소리의 주인은 아라 마누엘.


“그렇다고 해서 혁명 그 자체를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는 거라고.”


혁명 세력의 상징이 된 여걸이었습니다.



91. 미래


“우리는 단지 이 자식한테 놀아났기 때문에 혁명이라는 엄청난 일을 일으켰던 게 아니야. 절실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라의 목소리는 낭랑한 미성이라고 하긴 힘든 목소리였지만 신기하게도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건 아버님이 가진 것과 똑같은 능력—— 쉽게 말해 타고난 카리스마였습니다.


“귀족들은 우리를 돌보지 않았어. 실제로 굶어 죽는 사람이 나올 지경이었다. 어떤 사정이 있었던 간에 거기 두 사람은 귀족의 대표자잖아? 책임이라는 게 있지 않겠어?”


사라스와는 달리 아라는 흠이 잡힐만한 구석이 없습니다.

아라의 주장에 반론하는 건 힘들어 보였습니다.


게다가——.


“구세력은 물러가라—!”

“귀족을 죽여라—!”

“혁명 만세!”


아라의 말에 호응하는 군중들은 기세를 타고 있었습니다.

레이가 열심히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지금 군중들은 레이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포로롱…….


소란 속에서 조용히 울려 퍼지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그 소리는 처음엔 금방이라도 군중들의 노성에 파묻혀 버릴 것 같은 희미한 소리였지만 파도가 쓸려가듯, 스며들며 번지듯, 군중들의 매도를 지우며 음색으로 덧칠했습니다.

세인 님의 하프 소리입니다.


“백성들이여. 한번만이라도 좋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겠나?”


저음으로 울리는 바리톤의 미성은 이미 왕의 품격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군중—— 게다가 아라까지 잠자코 입을 다물고서 얘기를 경청할 자세를 취했습니다.


“레이 테일러, 말해보도록.”

“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세인 폐하.”


세인 폐하께 감사의 예를 올린 레이가 다시금 군중들을 향해 호소했습니다.


“친애하는 시민 여러분. 당신들의 바람은 무엇입니까?”


부드럽게.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는 모습. 목소리와 표정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귀족을 죽이고 싶었던 겁니까? 아니잖아요? 가장 바라고 있었던 건 스스로의 평온한 생활…… 그렇지 않습니까?”


제 눈에는 군중들이 당황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직까진 반감이 더 크다는 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조금씩 레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우리 민중들의 평온을 위해서 지금까지 그 누구보다도 힘써왔던 도르 님과 클레어 님을, 당신들은 죽이자고 주장하는 건가요?”

“우리 민중은——!”

“민중이라는 단에 뒤에 숨지 말아 주세요! ……당신, 이름은?”


레이가 이름을 묻자 소리를 질렀던 남성이 입을 다물었습니다.


“돌을 던졌던 거기 당신은? 그 옆의 당신은?”

“윽…….”

“저는 당신들 개인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한 명 한 명이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당신. 당신은 도르 님과 클레어 님을 여기서 죽이고 싶다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합니까?”


이번에는 어떠한 반론도 없었습니다.

교묘한 심리 유도입니다.

한 명씩 이름을 호명하는 걸로 군중심리에서 빠져나오도록 만들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귀족 중에는 평민을 돌보지 않았던 자들도 있었지요. 하지만 이 두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평민들이 점차 귀를 기울이는 걸 확연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두 사람을 처형한다고 한들 당신들은 자기 자식들에게 그걸 자랑할 수 있습니까? 우리들의 혁명은 올바른 일이었다고 가슴을 펴고 말할 수 있나요?”


저런 말재주를 레이한테 가르쳐 준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저니까요.


“클레어 님도 클레어 님입니다.”

“……네?”


갑자기 이야기의 화살이 제 쪽으로 향하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새총 맞은 비둘기 같은 얼빠진 표정을 지었습니다.


“이 이후 평화를 되찾고 나서 모두가 미소 지으며 살 수 있게 되었을 때, 클레어 님마저 죽어버리고 만다면 지금까지 자신을 희생한 도르 님의 명예는 누가 되찾아 주는 거죠?”

“그, 그건…….”


아픈 부분을 지적당했습니다. 게다가 설마 레이가 저한테 따져 물을 거라고는 상상을 못해서 의표를 찔린 탓에 저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있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쓰고 죽는 게 귀족인가요! 개죽음 당하는 게 명예인가요?!”“기다려요, 레이. 제 이야기를——.”

“그런 한때뿐인 명예를 위해 죽는 것보다도 한순간만이라도 좋으니까 저를 위해 살아주세요!!”

“……하지만 저는.”


귀족이라면 여기서 백성을 위해 생을 마감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쯤은 내 어리광을 들어달라고요, 이 바보오오오—!!!”


처음으로 들어본 레이의 절규가 제 마음을 크게 흔들어놨습니다.


“바, 바보라니…… 당신…….”

“바보오오오! 클레어 님은 바보야아아아!! 으아아아아앙!!!”

“레, 레이…….”


레이가…… 울고 있었습니다.

저 레이가요.

언제나 얄미울 정도로 여유만만하고, 항상 저한테 장난을 치던 레이가 눈물범벅인 채로 엉엉 울고 있습니다.

보기에 따라선 그저 꼴사나울 뿐인 눈물 젖은 얼굴이 저를 도무지 안절부절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럴 때 대체 뭐 하는 거예요, 클레어 프랑소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 울고 있다고요.

뭘 꾸물대고 있는 건가요.

당신의 두 팔은 장식인가요.

제가 지금 해야 할 행동은 뭐죠?

——당장 뛰어가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거잖아요!!!


“너희들 말이지…… 사랑싸움을 할 거라면 딴 데서 해달라고, 딴 데서.”


아라의 목소리에 간신히 정신이 들었습니다.

고개를 돌리니 아라가 벌레라도 씹은 듯한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어이, 누가 얘 좀 데려가 줘.”

“싫어요! 저는 클레어 님한테서 이제 평생 떨어지지 않을래요! 클레어 님이 죽겠다고 한다면 저도 죽을래요!”

“자, 잠깐만요, 레이——!”

“아— 아—! 알겠어. 알겠으니까 조용히 좀 해. 울지 좀 마. 어차피 처형은 취소일 테니까.”

“……네?”

“저길 보라고.”


제가 곤혹스러워하며 말하자 아라가 군중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습니다.


“확실히…… 이제 귀족 때문에 고민할 일은 없는 거니까.”

“나는 클레어 님이 구해주셨어.”

“나도. 내가 섬기던 귀족이 나쁜 자식이었거든. 먹고살 길이 막막해졌을 때 클레어 님이 재취업 자리를 알선해 주셔서——.”


흐름이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아라는 저를 묶고 있던 포승줄을 잘라버리더니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습니다.


“민중이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기 시작했어. 이제부터는 나 한 사람이 이끌어나가는 시대도 아닌 모양이니까.”

“아라…….”

“나는 목적을 달성했다. 귀족이라는 썩어빠진 제도가 없어진다면 그다음의 일은 아무래도 좋아. 목숨까지는 빼앗지 않을게. 어차피 귀족 따위, 가만히 내버려 둬도 알아서 뒈져버릴 놈들이 태반일 테니까.”


평민들에게 머리를 숙이면서 돈을 구걸하는 옛 귀족이라는 구경거리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며 아라가 호쾌하게 웃었습니다.


“자, 어서 가봐. 새로운 시대의 개막에 칙칙한 표정을 어울리지 않는다고.”

“……정말 고마워요.”


저는 인사를 남기고서 아직도 코를 훌쩍이고 있는 레이를 데리고서 재판장을 빠져나왔습니다.


◆◇◆◇◆


“……정말이지 진짜, 당신이란 사람은…….”


저는 의사당 근처에 있는 공원에 가서 레이보고 잔디위에 정좌하라고 시켰습니다.

레이는 납득이 안 안가는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런 건 제 알 바 아닙니다.


“많은 사람한테 폐를 끼치고…… 반성하고 있나요?”

“저, 저기요…… 클레어 님? 아니 보통 이런 흐름이라면 클레어 님이 아주 기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저한테 감사나 사과의 말을 건네야 하는 장면이 아닐까 싶은데요…….”

“뭘, 횡설수설하는 거예요!”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애초에 레이는 매번 매번 그렇게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저는 레이한테 설교를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다 부끄러움을 숨기기 위한 방편입니다.

사실은 당장이라고 안아주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레이에게 향하는 감정 때문만은 아닙니다.

저를 위해 모두가 와줬다는 사실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습니다.

귀족의 자존심과 레이 앞에서 의연해 보이고 싶은 허세가 없었더라면 분명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을 겁니다.


“……뭐, 너무 그렇게 혼내지 말라고, 클레어.”

“세인 님! ……아니, 세인 폐하.”


쑥스러움을 감추려고 짐짓 허세를 부리며 말을 쏟아내고 있던 저를 말려준 사람은 세인 폐하였습니다.


“재판은 이제 괜찮은 건가요?”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중지됐어. 애당초 그 재판은 너희들을 본보기로 삼기 위한 목적으로 사라스가 제안한 일이야.”


혁명정부 입장에선 이미 다 끝난 안건이었다고 세인 폐하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레이가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세인 폐하. 폐하께 감사 인사를 드리는 걸 잊었습니다.”

“……뭘 말하는 거지?”

“하프 말입니다. 정말 굉장했어요.”

“정말이에요. 모두들 그 소리에 흠뻑 빠져들고 말았는걸요.”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심심풀이지.”


몹시도 훌륭한 솜씨였는데 불구하고 여전히 세인 님은 하프 연주에 큰 가치를 두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그 하프는 어떤 분에게 배우신 건가요?”

“……어머니다. 아직 살아계셨을 때, 병상에서.”

“그랬던 거군요. 아——.”


레이는 뭔가 깨달은 것처럼 손을 탁, 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인 폐하는 지금도 여전히 어머님께 사랑받고 계신 거군요.”


세인 님이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습니다.

어떻게 된 걸까,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더니 갑자기 세인 님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습니다.


“폐, 폐하?!”

“세, 세인 폐하. 괜찮으신 건가요?!”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지만——.”


——어머니는 언제나 내 옆에 계셔주셨구나.


세인 폐하는 혼잣말처럼, 그러면서도 되새기듯이 말했습니다.

한때는 동경했던 사람.

레이를 사랑하는 지금은 그게 동경의 범주 안에 있는 마음이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래도 그 소중한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오랜 세월 품고 있었던 상처 하나에 마침내 연고를 바를 수 있게 된 걸 보자, 저는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아버님이 우리를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어딘지 아쉬운 듯한, 그러면서도 안심하는 표정으로 멀리서 우리를 지켜봐주고 있었습니다.

살아남고 말았구나—— 그런 말이 들린 것 같았습니다.

그러네요.

하지만 분명 이렇게 된 데도 뭔가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레이, 클레어, 열심히 노력했구나. 역시 내가 인정한 두 사람이야.”

“클레어 님, 오랜만이에요!”

“마나리아 언니! 거기다 레네까지!”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사람들과 재회하자 마음속에서 기쁨이 무럭무럭 샘솟았습니다.

그건 레네도 마찬가지인지 저한테 와락 안기는 레네의 눈꼬리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맺혀 있습니다.

저도 덩달아 찔끔 눈물이 났습니다.


“레이, 질투하는 거냐? 뭣하면 언제든지 내 신부로서 내 곁에——.”

“안 갑니다.”

“그렇겠지—.”


그러면서 껄껄 웃는 사람은 로드 님이었습니다.

밝고 긍정적인 성격은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로드 님은 앞으로도 꺾이지 않고, 흐트러지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 나가겠죠.


“레이 씨…… 클레어 님…….”

“릴리 님.”


릴리 추기경은 양팔을 병사들한테 붙잡힌 채로 다가왔습니다.


“죄송하다는 한마디를 하고 싶어서.”

“무슨 그런. 릴리 님은 전혀 잘못한 게 없습니다.”

“그 말 대로예요. 모든 건 사라스가 뒤에서 조종했던 거잖아요.”


그 얼터라는 인격은 사라스의 손에 만들어진 인격.

릴리 추기경 또한 한 명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릴리가 했던 짓은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릴리는 민중 여러분의 판결을 기다릴 거예요.”


그녀의 결의는 확고해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녀에게 해줘야 하는 건 어설픈 위로가 아니겠죠.


“그렇군요. 그렇다면 죄를 확실히 속죄하는 거예요.”

“클레어 님 그런 말투는——.”

“그리고 속죄가 끝나면 반드시 돌아오도록 하세요. 우리는 언제까지나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


그렇게 말하자 릴리 추기경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습니다.


“고맙습니다, 클레어 님. 언젠가 다시 레이 씨를 사이에 두고 다툴 수 있게 해주세요.”


그 말을 남기고서 릴리 추기경은 병사들에게 연행됐습니다.

사법 판결이 어떻게 나올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부디 그녀에게도 행복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그렇게 굉장한 멤버들이 모였구만.”


로드 님이 여기 모인 사람들의 면면을 둘러보면서 휘파람을 불었습니다.

듣고 보니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멤버들입니다.

세 왕자님에다 언니, 레네와 램버트, 미샤까지 달려와 줬습니다.


“정말로 그러네요. 클레어 님도 레이도, 인복을 타고났어요.”

“그게 아니야, 미샤.”


감개무량한 듯이 말한 미샤를 부드럽게 타이른 사람은 유 님이었습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다들 레이와 클레어한테 구원받은 사람들뿐이야. 클레어와 레이가 지금까지 해온 일들이 지금 이런 형태로 나타난 거야.”


유 님의 말은 제 가슴속 깊이 스며들었습니다.

어머님, 보고 계신가요?

레이와 만나고 함께 많은 일들을 해왔어요.

거기에 몰두한 채로 무작정 앞을 향해 달려왔지만, 그저 제멋대로일 뿐이었던 저에게도 이렇게나 친구가 잔뜩 생겼어요.


“자자, 레이. 클레어와 다시 만나게 된다면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 아니었어?”


갑자기 언니가 장난스러운 어조로 레이에게 말하면서 제 등을 툭, 밀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앞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갔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코앞에는 수줍은 표정을 지은 레이가.


“아— 저기……, 클레어 님?”

“뭐, 뭔가요.”

“아뇨……. 역시 아무것도 아니에요.”

“애매모호한 태도네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확실히 말하세요.”


말하지 않아서 후회하게 될 날이 또다시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어요. 저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 말은 저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말입니다.

죽기 직전에서 살아난 목숨입니다.

저 또한 꼭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클레어 님!”

“그러니까, 뭔가요.”


쑥스러운 마음에 새치름한 말투로 대답하자, 레이는 저 어깨를 양손으로 감싸 안았습니다.


“저와 결혼해주세요!”


레이의 말이 제 뇌까지 도달하기 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들은 말을 이해한 순간, 저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걸 억누를 수 없었습니다.

주변에서 휘익— 휘익— 휘파람을 불며 환호합니다.


“이, 이이이, 이렇게 많은 사람이 다 보는 앞에서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그런 건 둘만 있을 때 엄숙한 분위기에서 말이죠……?!”


설마 프러포즈를 받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탓에, 저는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서 쩔쩔맸습니다.

사실은 쉬운 일입니다.

그냥 네, 하고 고개를 끄덕이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순간이 되어서도 여전히 솔직해지질 못하는 겁니다.


“아, 그런가요? 그럼 다시 하게 해주세요.”

“그, 그래요? 특별히 용서해드리겠어요.”

“아뇨, 그쪽이 아니고.”

“네?”


당혹스러워하는 저를 끌어당기더니 레이는 부드럽게 제 입술을 빼앗았습니다.

다시 한번 뇌정지를 일으키는 저.

그리고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지는 사람들.


“첫 키스가 그렇게 시시한 건 싫으니까요.”


레이는 기습 대성공이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웃었습니다.


“저…… 저저저, 정말이지! 당신은 정말로정말로정말로! 정말로 레이니까 말이죠. 정말로 레이는 머리가 레이니까요!”

“제 이름이 뭔가 이상한 형용사로 쓰이고 있는데요?!”


정신을 수습한 제가 레이를 토닥토닥 때렸습니다.

레이는 뭔가 깨달음을 얻은 표정을 짓고선 제가 때리는 대로 맞아주고 있습니다.

이게…… 레이 주제에!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을 거니까요?”

“““……뭐?”””


레이와 주변 사람들이 한목소리가 되었습니다.


“그, 그러니까, 저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을 거니까요?!”

“…….”

“뭐, 뭐예요. 뭐라고 말 좀 해보…….”


한 박자 후에 주변에서 성대한 축복의 환호성.

창피해서 주변 사람들이랑 눈을 못 마주치고 있었더니 레이는 제 손을 붙잡고서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어디로든요! 이제 어디로든 갈 수 있으니까요…… 둘이서 함께라면!”


미래.

그건 진즉에 포기하고 있었던 가능성입니다.

그건, 말하자면 아직 무엇도 그려 넣지 않은 캔버스와도 같은 것.

저는 이제부터 새하얀 캔버스에 어떤 그림을 그려 넣게 될까요.

하지만 확신할 수 있는 게 한 가지 있습니다.


그 캔버스에 그려진 제 모습 옆에는 레이도 함께 있을 게 틀림없습니다.



■에필로그


■평민 주제에 건방지군요!


“헤에— 그때 클레어 님, 그런 생각을 하셨던 건가요.”

“레이야말로 지금까지 계속 말 안 하고 있었다니 치사해요.”


혁명이 끝난 지도 몇 달이 지났습니다.

저는 레이와 함께 교외에 집을 마련해 조용하지만 평온한 생활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레이도 저와 마찬가지로 일기를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돼서, 서로의 일기를 서로 바꿔 읽어보자는 흐름이 되었습니다.

테라스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천천히 일기를 읽어보았습니다.


레이의 시선으로 보는 1년 남짓한 기록은 제가 봐온 지난날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처음 만났을 무렵에 저는 레이를 완전히 방해꾼 취급했는데, 레이는 그때부터 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때 제가 했던 행동들을 떠올려보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집니다.

그런 짓을 했는데 용케도 정나미가 떨어지지 않았구나 싶습니다.


“클레어 님이 봤을 때 가장 의외였던 점은 어떤 건가요?”


레이가 문득 그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저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서 잠시 생각한 다음 대답했습니다.


“가장 의외는 역시 아버님의 계획에 대한 거네요. 만난 지 거의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잖아요?”

“아— 그건가요. 클레어 님한테는 비밀로 하고서 이것저것 꾸미는 건 즐거웠어요.”


그렇게 말하는 레이의 표정은 완전히 장난꾸러기 소년 같은 표정입니다.

저한테 비밀로 했다는 점은 부아가 치미는 부분이었지만, 제 성격을 고려해 보면 레이와 아버님의 선택이 옳았다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결국 저는 뭐라 대꾸할 말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레이는 어떤가요? 제 일기를 읽고서 가장 의외였던 점은요?”


듣자하니 레이에겐 미래의 일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고 하니까요.

그중에는 저에 대한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고 하니, 사실 의외였던 건 하나도 없지 않았을까요.


“의외인 점이 너무 많아서 하나만 못 정하겠어요.”

“그렇게나요?”

“네. 그야 클레어 님은 처음 막 만났을 때도 그다지 악역 영애답지 않았잖아요.”

“그, 그런가요……?”


레이의 말로는 좀 더 악역무도한 면모를 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더니 생각과는 다르게 친구들을 아끼는 선량하기 그지없는 소녀라, 좋은 의미에서 기대를 배신당했다고 합니다.


“피피 님과 로렛타 님도 단순한 부하가 아니었던 거군요.”

“두 사람은 제 절친이에요. 부하라니 듣기 안 좋게.”

“죄송합니다.”

피피와 로렛타에게 있었던 일들도 일기에 적어놨습니다.

두 사람을 그리 좋게 보지 않았던 레이에게는 제 일기가 좋은 반성의 기회가 됐던 모양입니다.

두 사람은 우리의 공통의 지인이니까요.

오해를 풀고 친하게 지내주지 않으면 제가 곤란해요.


“아모르의 제사 때 일기도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앗! 그 부분은 읽으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어? 그게 꼭 보라는 뜻 아니었어요?”

“왜 그런 뜻으로 받아들이는데요?!”


결과적으로는 우리의 관계가 한 단계 발전하는 계기가 된 아모르의 제사지만, 저에게는 차마 부끄러워서 다시 떠올리기 힘든 흑역사입니다.


“이야……. 절실히 느끼는 점이지만, 저는 생각보다 많이 사랑받고 있었군요.”

“그렇다고요. 둔탱이.”

“죄송합니다.”


제가 톡 쏘아붙이자, 레이는 살짝 머쓱해하며 웃었습니다.


“클레어 님이 귀족으로서 성장해 나가는 성장기록 측면으로 봐도 재미있었어요.”

“그러지 마세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무렵의 저는 정말 유치했어요.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아요.”


아직 평민을 그냥 피지배층으로밖에 보지 못했던 그 시기.

구걸하는 아이들을 보고 혐오감을 품었던 미숙한 자신.

도르 프랑소와와 밀리아 프랑소와의 딸로서 있을 수 없는 추태입니다.


“하지만 몰라보게 성장하셨잖아요. 지금은 혁명의 소녀라고 불리고 있는데요?”

“그것도 하지 말아주세요. 거의 다 당신과 아버님이 깔아놓은 길이었잖아요. 제가 한 일이라곤 얼마 없어요.”


다른 사람의 공적을 자기 걸로 삼아 자랑할 정도로 뻔뻔한 사람이 되지는 않을 거예요.

귀족이 어떻고, 평민이 어떻고,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건 제 자존심의 문제예요.


“그건 그렇고……. 약간 의아한 서술이 있단 말이죠.”

“네?”

“클레어 님한테 룸메이트가 있었나요?”

“아니요? 저는 계속 독실을 썼는데요?”


저는 그래서 제가 공작가 영애라 특별 취급을 해주나 싶었습니다.


“역시 그렇죠. 그런데 일기를 보면 클레어 님에겐 룸메이트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것도 소꿉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허물없고, 오랫동안 알고 지낸 귀족 여성이.”

“그럴 수가…….”


그런 사람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저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밖에 없을 텐데요.

가족과 메이드 장, 레네를 제외하면 남는 사람은 피피와 로렛타 정도뿐입니다.

소꿉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사람은 짐작 가는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 똑똑히 쓰여 있습니다. 이름은…… 카트린 아샤르 님이에요.”

“카트린 아샤르…… 아샤르 공작가 사람인 걸까…….”


역시 들어봐도 제가 모르는 이름입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요.

그 이름을 들은 순간 가슴이 세차게 뛰는 느낌입니다.


“카트린? 아아, 걔구나.”


기억 한구석에 그 이름이 묻혀있지 않을까 하고 열심히 생각하고 있는 우리를 향해 갑자기 말을 거는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마나리아 언니!”

“안녕, 클레어. 레이도 건강해 보이네.”

“덕분예요.”


혁명 때 도움을 받은 이후로, 몇 달 만의 재회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있을 여유가 없었습니다.


“언니는 알고 계신 건가요? 이 카트린이라는 아이에 대해서.”

“응, 알고 있어. 그녀는…… 그렇지. 몹시도 슬픈 운명에 처한 아이야.”

“설마…….”

“아니야, 레이. 그녀는 살아있어. 그래도 너희들을 만나러 올 일은 없겠지만.”


언니는 뭔가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걸 설명할지 말지 망설이는 모양입니다.


“그녀가 너희 앞에서 기억 채로 모습을 감춘 건, 아마 그녀의 굳은 의지일 거야. 나로선 그걸 존중해주고 싶은 마음이야.”

“그래도——!”

“응, 클레어가 하고 싶은 말도 잘 알아. 소꿉친구였던 아이를 머릿속에서 잊어버린 채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지.”


벌떡 일어나려고 하는 저를 달래면서 언니가 말을 이었습니다.


“내가 확인하고 싶은 점은 한 가지. 카트린 짱과의 기억에는 클레어에게 있어서 커다란 상처가 될 만한 일이 포함되어 있어. 그렇다면 그건 그녀를 원망하는 마음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뜻이야.”

“…….”


언니의 눈빛은 진지했습니다.

진심으로 저를 걱정해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언니는 타인인 카트린 양보다도 제 마음을 우선해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겠죠.


하지만——.


“상처 또한 한 가지 경험이에요.”

“클레어…….”

“잊어도 괜찮은 상처 같은 건, 단 한 가지도 없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쓰리고 괴로운 기억이라고 해도 그것 또한 제 일부예요. 그걸 잃은 채로는 있을 수 없어요.”


추억은 항상 즐거운 것만 있지 않기 때문에 더욱 고귀한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구나……. 그렇다면 더는 말하지 않을게. 카트린 짱과의 기억을 되돌려주겠어.”


언니는 저와 레이를 향해 스펠 브레이커를 썼습니다.

그와 동시에 제 안에서 기억의 파도가 밀려듭니다.


“클레어 님!”

“괘, 괜찮아요. 잠깐 현기증이 일었을 뿐이에요.”


의자에서 넘어질 뻔한 저를 레이가 황급히 달려와 부축해주었습니다.

그럴 정도로 잃었던 기억은 막대한 양이었습니다.


“카트린…… 어째서…….”

“기억도 돌아왔으니 이제 알겠지? 카트린 짱은 자기가 저지른 죄를 용서할 수 없는 거야.”


한때는 암살자로서 어머님에게 접근했던 일, 그리고 자신을 구하기 위해 어머님이 희생했던 일을 카트린은 계속 후회해왔다고 언니가 말했습니다.

그건 사실이긴 하지만 사실의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저는 카트린을 찾으러 가겠어요.”

“함께하겠습니다, 클레어 님.”

“이런이런. 그렇게 나오지 않을까 싶긴 했어.”


그렇게 말하면서 언니는 한 장의 편지를 저에게 내밀었습니다.


“이건?”

“카트린 짱의 현재 주소야. 그녀는 지금 아파라치아에 있어.”

“언니, 사랑해요!”


저도 모르게 언니에게 와락 안겼더니 언니는 웃으면서 제 포옹을 받아줬습니다.

레이가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만나러 갈 거라면 서두르는 편이 좋아. 그녀는 여기저기를 계속 돌아다니고 있는 모양이니까.”

“가겠다고 정했으니 바로 준비하겠어요, 레이. 메이랑 알레어를 불러와주세요.”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


이리하여 저는 레이와 함께 아파라치아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습니다.

이제 곧 카트린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 마음이 흥분으로 들끓는 걸 억누르기 힘들었습니다.


“기뻐 보이시네요, 클레어 님.”

“그거야 당연하죠. 카트린은 저에겐 자매와도 같은 아이인걸요.”

“……신 거죠?”

“네?”


잘 들리지가 않아서 저는 레이에게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레이는 드물게도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선,


“카트린 님한테 연애 감정은 없으신 거죠?”


라고 말했습니다.


“레이.”

“네.”

“당신 설마 질투하는 거예요?”

“네, 그렇다고요, 에잇 젠장—!”


레이는 갑자기 마차 벽에다가 머리를 박기 시작했습니다.


“하지 마세요, 그러다 다친다고요?!”

“으으……. 내 좁은 마음이 원망스러워……. 클레어 님이 너무 귀여운 게 나쁜 거야…….”

“무슨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건가요. 카트린은 여동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에요.”


나 참, 이상한 부분에서 걸고넘어진다니까.

그래도…….


“그래도…… 후후. 연인이 질투를 해주는 건 의외로 나쁘지 않은 기분이네요?”

“클레어 님은 악녀.”

“어디 마음껏 말해보세요. 어머, 그랬군요. 레이는 카트린한테 질투하는 거군요.”

“흥핏쳇.”


제가 놀리자 레이는 완전히 토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농담이에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에요, 레이.”

“피이—.”

“어휴……. 기분 풀어줘요. 자요.”


저는 양손으로 레이의 뺨을 감싸 쥐고서 가만히 입술을 떨어트렸습니다.


“키스 정도로는 무마할 수 없거든요.”

“그럼 어떻게 하면 기분을 풀어줄 건가요?”

“……무릎베개.”

“……이리 오세요.”

“앗싸—!”


제가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으며 무릎을 탁탁 두드리자, 레이는 바로 희희낙락하며 머리를 누였습니다.


“이런 걸로 괜찮은 거예요?”

“무슨 말씀이세요! 아무리 세상이 넓다 해도 클레어 님의 무릎베개를 받을 수 있는 건 오직 저만의 특권이라고요!”

“그건…… 그렇지만요.”

“카트린 님한테도 해주면 안 되니까요!”


저한테 신신당부하면서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기분이 풀어진 레이는 어쩐지 어린애 같았습니다.


(후후…… 귀여운 사람.)


조금씩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레이의 옆모습을 보면서 저는 문득 생각했습니다.

제 마음을 빼앗아 가다니.


평민(레이)주제에 건방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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