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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했어—!”

“수고했어요—!”


진즉에 날도 저물었고, 평소대로라면 기숙사 통금시간이었을 시각.

학원 학생들은 후야제에 참석했습니다.


“이야— 생각보다 즐거웠지.”

“나는 무진장 일했어. 웨이트리스는 엄청 힘든 일이구나.”

“그치그치. 요리도 쉽지 않고 말이야. 엄마를 조금 존경하게 돼.”

“그건 훨씬 일찍 깨달았어야지.”


문화제에서 사용한 종이나 목재를 장작 삼아 태우는 캠프파이어를 둘러싸고서 학생들은 각자 자유로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대부분 평소에 경험할 수 없었던 문화제라는 시간을 돌이켜 보면서 아쉬워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반 친구들과 더욱 거리를 좁히고 돈독한 관계가 되길 바란다는 학원의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모양인지, 학생들은 문화제 이전과 비교해 보면 훨씬 친해진 모습입니다.


“……여기 있었네.”

“메이…….”

“……반 애들이랑 뒤풀이 안 해도 돼?”

“……네.”


카페도 무사히 마쳤고, 반 애들은 교실에서 남은 음료와 음식을 먹으며 뒤풀이를 즐기는 중입니다.

저는 처음 몇 분 정도만 잠깐 참가한 다음 바로 먼저 일어나겠다고 양해를 구하고서 여기로 왔습니다.

잠깐 혼자 있고 싶은 기분이라 캠프파이어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잔디에 오도카니 앉아 있던 참입니다.


메이는 같이 다니던 애들한테 무어라 몇 마디 건네고서 헤어진 다음 제 옆에 앉았습니다.


“그럼 먼저 갈게, 메이 짱.”

“메이가 있어 준 덕분에 살았어.”

“……별거 아니야.”


보아하니 저 애들은 메이랑 함께 마물들과 맞서 싸운 애들인가 봅니다.

메이랑 같이 온 애들이 가고 나니 우리 사이에 잠시 동안 침묵이 찾아왔습니다.

서로 모르는 게 없는 사이긴 하지만, 최근 몇 년간 메이랑 살짝 거리감이 있었기 때문에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몰라서 조금 고민이 됐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메이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미안해.”

“? 뭐가 말인가요?”

“……메이가 빠지는 바람에 알레어나 릴리 님, 연극부 애들한테 폐를 끼쳐서.”


그렇게 말하는 메이는 어딘지 침울한 기색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메이는 문화제 그 자체를 지켜준 거잖아요? 감사할지언정 누구도 메이를 책망할 수 없어요.”

“……하지만 메이 때문에 연극은 급하게 대응해야 했어. 알레어도…….”

“제가 마음에 걸리는 건 저 자신의 미숙함이에요. ……설마 그런 실수를 저지를 줄은.”


대사를 잘못 말하는 기초적인 실수를 다른 누구도 아닌 제가 저지를 줄이야.

물론 저는 레이 어머니의 딸이니만큼 뭔가 깜빡하거나 부주의한 실수를 할 때도 종종 있는 편이긴 하지만요. 아무리 그래도 이번에는 훌훌 털고 넘어가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런 건 실수 축에도 안 들어.”

“그러려나요.”

“……그렇다니까.”

“클레어 어머니라면 이런 실수를 안 하지 않았을까요?”

“……클레어 엄마라면 애초에 연극에 참가를 안 했을 거야.”

“……그건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메이가 저를 위로해 주려고 한다는 걸 알 수 있어서 조금이지만 웃음을 되찾았습니다.


“……게다가…… 그 마음 자체는 거짓말이 아니었잖아?”

“네, 당연하죠. 저는 릴리 님을 좋아해요. 이번 실패는…… 배역에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살짝 자제심을 잃었다고 해야 하나…….”

“……폭주하는 버릇은 엄마들한테 물려받은 거야.”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건 없을 텐데 말이죠.”


제가 그렇게 말하자 메이는 제 얼굴을 마주 보며 키득키득 웃었습니다.


우리가 한바탕 웃고 있었을 때, 조그만 체구를 가진 누군가가 다가오는 걸 눈치챘습니다.


“아, 알레어 짱, 메이 짱, 수고했어요.”

“수고하셨어요, 릴리 님.”

“……수고.”


릴리 님은 메이를 가운데에 두고서 제 반대편에 앉았습니다.

평소라면 불만 한마디 정도 해야 할 상황이겠지만 지금은 아까 전에 저지른 실수 탓인지 그다지 내키지 않았습니다.

잠시 동안 셋이서 타오르는 모닥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더니 릴리 님이 입을 열었습니다.


“여, 연극에 참가해 보니 어땠나요?”

“귀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을 연기한다는 건 무척이나 신선한 경험이었는걸요.”

“……마지막의 마지막에 대형 사고를 치긴 했지만 말이야.”

“메이!”

“쿡쿡……. 그런가요.”


가볍게 투닥거리는 저와 메이의 모습을 릴리 님이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메이 짱은 대활약을 했네요. 마물의 습격을 막아내고 알레어 짱을 위기에서 구해주고…….”

“……활약으로 따지면 릴리 님도. 대역의 대역으로 무대 위에 섰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연기였다는 평판이야.”

“맞아요. 입소문이 자자하던데요?”

“그, 그때는 엄청 몰입하는 바람에…….”


메이의 조력 덕택에 탄생할 수 있었던 그 찬송가 장면은 엄청난 호평이었는지, 연극을 관람한 일부 학생들을 중심으로 점점 얘기가 퍼지고 있었습니다.


“좋은 거잖아요. 릴리 님의 평판이 올라가는 건 기쁜 일이에요.”

“……연인으로서 자랑스러워?”

“네에!”

“메, 메이 짱, 기정사실인 것처럼 만들지 말아줄래요?!”

“…….”


메이가 장난을 치자 릴리 님이 당황합니다.

저는 항상 주고받던 패턴인가 싶었는데 기분 탓일까요, 메이의 낌새가 어딘지 이상합니다.


“메이?”

“……목이 마르네. 알레어, 마실 것 좀 사다 줄래?”

“그거야 상관없지만…….”

“아, 그러면 릴리가——.”

“……릴리 님은 앉아 있어. 잠깐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


메이의 목소리에선 거절을 용납하지 않는 박력이 느껴졌습니다.


“그럼 다녀올게요. 과실수면 되나요?”

“응.”

“릴리 님은?”

“리, 릴리는 괜찮아요.”

“그렇군요. 다녀올게요.”


저는 두 사람을 두고 자리를 떴습니다.


음료를 나눠주는 곳으로 가자 마침 시몬이 있었습니다.


“시몬, 수고가 많네요.”

“안녕, 알레어. 연극은 무사히 잘 마쳐서 다행이네.”

“무사히라고 표현하기에는 조금 찜찜한 점도 있었지만요.”

“그 정도야 괜찮잖아. 끝이 좋으면 다 좋은 법! 그런 거야.”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시몬이 저에게 과실수를 건넸습니다.


“메이랑 릴리는?”

“저쪽에서 대화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둘이서만 얘기하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이라 저 혼자 소외됐어요.”

“흐응—? 그럼 방으로 돌아갈래?”

“아뇨, 메이가 마실 걸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거든요. 아마 저를 잠깐 다른 곳으로 보내려는 핑계였겠지만요.”

“메이는 알기 쉬운 타입인지 알기 어려운 타입인지, 그 부분부터 참 알기 어렵단 말이지.”


시몬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면서 과실수를 한 모금 마셨습니다.


“아, 맛있네. ……아니 이게 아니지. 그러고 보니 감사를 전하는 걸 잊었네.”

“감사요?”

“카페 준비 작업을 했을 때 얘기야.”


반 애들이랑 응어리가 있었던 걸 풀어줬잖아, 하고 말하는 시몬.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그건 시몬, 당신 스스로 노력한 덕분이에요.”

“나는 나대로 노력하긴 했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계기를 만들어 준 사람은 알레어야. 그러니까 고마워.”


그러고 보면 메이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의외로 두 사람은 통하는 면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몬은 성실하네요.”

“됐•으•니•까! 잠자코 감사 인사를 받으라니깐!”

“알겠어요. 고맙게 받을게요. 대가는 이 과실수로 충분하겠네요.”

“뭐야 그게, 너무 싸잖아.”


시몬이 밝게 웃었습니다.


“슬슬 가보는 편이 좋지 않겠어? 할 얘기도 지금쯤이면 끝났겠지.”

“그럴게요. 시몬도 같이 갈래요?”

“나는 패스. 웨이트리스 일을 엄청 열심히 했더니 벌써 졸려. 먼저 방에 가 있을게. 잘 자.”

“안녕히 주무세요.”


저는 시몬을 배웅한 다음 과실수를 한 손에 들고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걷고 있으니 점차 두 사람의 모습이 가까워집니다.


“다녀왔——.”

“……있지,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아직도 알레어랑 사귀지 않는 거야?”

“메, 메이 짱…….”


두 사람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와 대화 내용을 듣고, 저도 모르게 근처에 있던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몰래 대화를 훔쳐 듣다니, 이런 상스러운 행동을 클레어 어머니께 들켰다간 바로 혼이 나겠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그럼 오늘 대역의 대역을 맡았던 건 메이 짱이 꾸민 일이라고요?”

“……맞아.”


상상조차 못한 내용에 한순간 귀를 의심했습니다.


“……처음부터 메이의 역할은 릴리 님한테 양보할 생각이었어. 마물한테 습격당했다고 거짓말을 하고서 말이지.”


진짜로 마물이 나타나는 바람에 깜짝 놀랐지만, 메이는 옅게 웃으며 덧붙였습니다.

듣자 하니 오늘의 습격 자체는 메이한테도 예상 밖의 사태였던 모양이지만, 메이는 처음부터 자기 배역을 릴리 님한테 넘길 작정이었나 봅니다.


“어, 어째서 그런 행동을……?!”

“……그야 당연히 알레어랑 릴리 님을 이어주려는 거잖아.”


예상 못 한 대화가 이어집니다.

저는 모습을 드러낼 타이밍을 완전히 놓치고 말았습니다.


“……연극에서 연인 역할을 연기한다니 자극적이잖아? 릴리 님한테는 좋은 충격요법이겠다 싶었어.”

“리, 릴리는…….”

“……저기, 알레어가 그렇게나 매력이 없어? 저렇게 일편단심인데 아직도 부족해?”

“메, 메이 짱…….”


따지듯이 강한 어조로 몰아붙이는 메이를 향해 릴리 님은 곤혹스러움이 여실히 드러나는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알레어는 착한 애야. 저렇게 매력적인 여자애는 좀처럼 없을 거야.”

“그, 그건 인정해요. 하지만 릴리는——.”

“……레이 엄마 핑계를 대는 건 금지야. 릴리 님은 한참 예전에 그 마음을 정리했을 텐데.”

“어, 어떻게……?!”

“……보면 알아. 몇 년을 함께 지냈다고 생각하는 거야.”


나무라듯 말하며 메이는 릴리 님이 도망칠 구석을 미리 차단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몰아붙였습니다.


“……메이를 계속 시선으로 좇고 있는 것도 알아. 내 얼굴에서 레이 엄마의 그림자를 찾고 있을 뿐이라는 것도.”

“…….”

“……릴리 님한텐 알레어가 최선이야. 두 사람이 서로 사귄다면 메이도 포기할 거야. 하지만——.”

“하, 하지만?”


뒷말을 재촉하는 릴리 님의 말에, 메이는 평소와 달리 한순간 주저하는 기색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말을 꺼내기로 결심했나 봅니다.


“……하지만 만약 릴리 님이 언제까지고 알레어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다면야 메이한테도 생각이 있어.”

“……생각이라면?”

“……있잖아, 릴리 님.”


메이는 릴리 님 쪽으로 몸을 불쑥 내밀더니 숨결까지 닿을 정도로 얼굴을 바짝 붙이고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알레어를 갖지 않을 거라면 메이한테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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