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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반신


※메이 프랑소와 시점의 이야기입니다.


릴리 님과 같은 부활동을 하게 됐다면서 잔뜩 들뜬 알레어를 보면서, 메이는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여전히 알레어는 오직 릴리 님만을 보고 있다.

정말 알레어답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메이는 가슴에서 무거운 아픔을 느꼈다.


——알레어는 메이 거였는데.


알레어는 이미 잊어버린 모양이지만 메이는 태어난 직후의 일을 기억하고 있다.

알레어와 메이는 오랜 시간동안 의지할 곳이 오직 서로의 존재뿐이었다.


파파는 태어났을 땐 이미 돌아가신지 오래였지만, 마마는 기억하고 있다.

어딘지는 잘 모르겠지만 메이와 알레어는 어딘가 유적 같은 곳에 있었다.

마마가 이끄는 대로 바우어로 왔지만 바우어에 도착하자마자 마마도 세상을 떠났다.

그 후의 일들은 지금 떠올려도 괴로운 기억이었다.


이제는 해결됐지만 알레어와 메이에겐 피의 저주가 있었다.

두 사람의 피에 닿으면 사람이든 물건이든 가리지 않고 마법석으로 변하는 저주였다.

마마가 세상을 떠나고 외가 쪽 친척들은 우리를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취급했다.

억지로 상처를 내서 피를 흘리게 만들고, 그 피로 얻은 마법석을 팔아서 생활비로 삼았다.

상처를 입을 때마다 느끼는 고통은 싫었지만, 알레어도 메이도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상황이 달라진 건 바우어 왕국에 일어난 화산 분화 때문이었다.

왕도에 막대한 피해를 가져온 분화에 휩쓸려 친척들도 남김없이 죽고 말았다.

알레어와 메이는 살아남았지만 그때 두 사람은 고작 5살—— 살아갈 방법은 많지 않았다.

슬럼가는 이재민들로 넘쳐났지만 그곳에서 둘이서 몸을 맞대며 온기를 나누었던 걸 기억한다.

당장 필요한 돈은 피로 만든 마법석을 팔아서 마련했다.


이윽고 쌍둥이의 소문을 들은 교회 쪽 사람이 두 사람을 데리러왔다.

하지만 그 시절 두 사람은 완전히 인간불신에 빠져 있었다.

메이도 알레어를 지키기 위해, 손을 내민 교회 사람들한테 저주를 써서 쫓아냈다.


찾아오는 사람이 몇 명인가 바뀌었고, 그때 나타난 사람이 릴리 님이었다.

릴리 님은 지금까지 찾아온 사람들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릴리 님이 우리에게 제일 먼저 한 일은 아무 말 없이 조금 떨어진 장소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오, 오늘은 좋은 날씨네요.』


릴리 님은 부지런히 우리를 찾아와서 두서없는 얘기를 늘어놨다.

처음에는 알레어도 메이도 릴리 님을 무시로 일관했지만, 점점 흥미를 갖게 되었다.

릴리 님이 얘기해주는 수도원이라는 곳은, 적어도 슬럼가보다는 마음 편한 곳일 것 같았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릴리 님은 그제서야 수도원으로 오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알레어도, 메이도, 슬럼에서 살아가는 데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마법석을 만드는 아이들이라는 소문은 꽤 널리 퍼져버려서, 개중에는 두 사람을 힘으로 협박하려 드는 사람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모 아니면 도라는 도박이었지만 알레어와 메이는 릴리 님을 따라가기로 결심했다.


릴리 님이 말해줬던 대로 수도원은 슬럼가에 비하면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살기 좋은 곳이었다.

식사도 제공됐고, 옷도 받을 수 있었다.

비바람도 피할 수 있는데다 폭한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다.

다만, 그 대신 기이하게 여기는 시선과 배척을 받게 됐다.


피의 저주를 가진 알레어와 메이는 수도원에서 부스럼 취급이었다.

노골적으로 박해하는 일은 없었지만 개중에는 두 사람을 이단으로 취급하는 성직자도 있었다.

그 시절 두 사람은 아직 이름조차 받지 못해서, 원이니 투니 하는 식으로 불렸던 게 기억난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서로뿐—— 그런 시기가 한동안 이어졌다.


(레이 엄마랑 클레어 엄마가 와주지 않았다면 분명 우리는 오래 버티지 못했을 거야.)


두 번째로 찾아온 전환점은 레이 엄마와 클레어 엄마가 우리의 보호자가 됐을 때였다.

왕국에서 일어난 혁명이 일단락되었을 때, 릴리 님이 속죄의 순례여행을 떠나게 된 걸 계기로 우리는 엄마들한테 맡겨졌다.

레이 엄마와 클레어 엄마는 지금까지 만나 본 어떤 어른들과도 달랐다.


우리에게 사람의 따뜻한 온기를 주었다.


완전히 인간불신에 빠져서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았던 우리에게 엄마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다가와 주었다.

우리가 받은 건 거절이나 냉소가 아닌 아낌없는 애정.

얼어붙어 있던 우리의 마음은 천천히 녹아내렸다.


(서로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생겼어.)


레이 엄마와 클레어 엄마에겐 아무리 감사를 해도 모자라다.

지금은 두 분을 진짜 부모님이라 느끼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럼에도 역시 메이에게 알레어는 특별한 사람이다.


(우리는 둘이서 하나…… 그렇잖아, 알레어?)


반신이라는 말이 있다.

메이에게 알레어는 지금까지 쭉 반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또 하나의 나.

설령 레이 엄마와 클레어 엄마와 알레어를 놓고 한 명을 골라야 하는 선택을 강요당한다면, 메이는 망설임 없이 알레어를 고를 것이다.


그런데도.


(알레어는 변해버렸어.)


한때 우리 둘의 마음에는 오직 서로뿐이었다.

레이 엄마와 클레어 엄마라는 보호자가 생겼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가 특별했다.

그런데 지금 알레어의 마음속에는 또 한 사람, 릴리 님이라는 사람이 자리를 잡았다.


(메이를 봐 줘, 알레어.)


릴리 님한테도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지옥과도 같은 슬럼가에서 우리를 꺼내주고, 우리에게 사람다운 생활을 선사해주었던 사람이 릴리 님이다.

하지만 메이한테서 알레어를 빼앗아 간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메이를 봐달라고, 알레어.)


처음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사이가 좋아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방법으로는 알레어를 붙잡아 둘 수 없었다.

메이는 방침을 전환했다.

알레어와 거리를 두기로 결심한 것이다.


포기한 게 아니다.

분명 우리 두 사람은 지금까진 지나치게 거리가 가까웠던 거다.

적절한 거리를 두고서 서로를 다시 한번 바라본다면 분명 또 다른 변화가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레어는 릴리 님 생각뿐.)


알레어는 메이가 언젠가부터 잘 어울려주질 않게 됐다고 말했지만 실제론 반대다.

먼저 메이한테서 떨어진 사람은 알레어인데.


봉사활동부 멤버들과 즐겁게 얘기를 나누는 알레어를 보고 있으면 속에서 안 좋은 감정이 치솟아 오른다.


(알레어는 메이 것인데.)


지금은 아직, 이 마음은 감춰두자.

알레어와 메이는 피가 이어진 친자매다.

동성혼이 합법화된 바우어에서도 근친혼은 금기다.

지금 메이가 알레어한테 마음을 드러낸다면 분명 이 사랑은 이뤄지지 못해.


(레네 씨와 램버트의 씨의 마음을 통감하게 돼.)


레이 엄마와 클레어 엄마의 오랜 지인인 두 사람은 친 남매면서도 혈통과 집안을 숨기고 다른 나라로 이주해서 부부로 살고 있다.

옛날엔 그 금단의 마음을 이용당해, 엄마들과 대립한 적도 있다나.

피가 이어진 상대를 마음에 품었다는 건 아주 무거운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순 없어.)


친자매?

피가 이어진 사이?

금기?

위법?

그게 어쨌다는 걸까.


누가 무슨 소리를 하든, 메이의 이 마음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설령 상대가 알레어라고 해도.


알레어는 릴리 님과 즐겁게 대화하는 중이다.

릴리 님은 난처한 듯이 웃고 있었다.

메이의 마음속에선 칙칙한 검은 감정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메이를 보도록 해, 알레어.


언젠가 이 말을 입 밖에 내게 될 날이 과연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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